SM전쟁 이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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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

가수 출신의 프로듀서이자 sm엔터의 설립자인 이수만은 1952년생으로 70세다.


이수만 덕분에 현재 K-POP이 존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이돌 시장에 성가신 실적을 남긴 그…

하지만 작명에는 영감이 없거나 토니안에게 ‘피클스’라는 예명을 주거나 신동에는 ‘우동’ 동방신기에는 ‘고조로쿠베’라는 기묘한 예명을 선물해 많은 가수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수만은 눈이 콤플렉스라고 한다.

1952년 6.25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 부산에서 태어난 이수만. 내때부터 아주 작은 눈을 가지고 친구에게 매일처럼 괴롭힘을 당했지만 결국 이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있게 되도록 왕목이라는 별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가수

이수만은 가수로 활동한 바 있다.


SM엔터의 수장으로 활동해 수많은 그룹을 데뷔했기 때문에 아이돌 대출이라고 불리는 이수만…

그러나 원래 그의 직업은 가수였지만 과거의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나름대로 인기를 끌고 가늘고 긴 얼굴과 작은 눈을 갖고 말을 닮았다는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비슷한 외모를 가졌던 이문세, 유열과 함께 마삼 트리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유학

이수만은 미국에 유학을 해온 적이 있다.


1980년대, 군부가 미디어 통폐합을 시도해 활동하고 있던 라디오에서 버려져 순식간에 백수가 되어 버린 이수만…

동시에 가수 활동에도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유학을 결심한 뒤 곧 미국으로 거소를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해 새로운 생활을 보내게 된 이수만. 하지만 TV를 보고 있는 가운데 유키즈 온더블록 같은 보이그룹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해외에서도 인기 있는 한국 가수를 만들 수 없을까? 라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sm엔터를 설립했다고 한다.


선구자

지금 K-POP 아이돌 시장은 이수만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듀서로 활동하기 시작해 현진영과 같은 가수를 배출한 이승만. 하지만 잘 나가고 있는 가운데, 대마사건으로 구속되었기 때문에, sm엔터의 이미지가 개척이나 회사가 한 번 멸망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수만이 자신의 전체 재산을 투자해 5인조 그룹 hot을 기획한 결과 대중으로부터 방대한 인기를 얻게 되어 hot가 벌어들인 돈을 이용해 ses, 신화 같은 아이돌 그룹 을 잇따라 히트시킨 결과, 대한민국의 아이돌 문화를 정착하게 되었다.

덧붙여서 hot 멤버를 선택하는 당시 소년 같은 이미지가 강력한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빈을 탈락시켰다고 한다.


JYP

이수만은 박진영을 탈락시킨 바 있다.


한때 이 오디션에서 탈락해 가수로 데뷔할 수 없었던 jyp. 그런 가운데 구준엽의 도움으로 s 멘토의 오디션을 보게 되었지만, 이때 박진영이 자신의 자작곡의 날을 떠나지 않는 마을을 부르자 이수만이 개성 넘치는 진 형파괴 얼굴을 보면 “아…
유감스러운 뭔가 조금이 아닌 것 같다’며 곧바로 진영박을 탈락시켰다고 한다.

덧붙여서 오디션이 끝난 뒤 이수만이 실망한 채 밖에 나선 박진영에게 “잠깐 기다려도 노래해서는 안 돼?” 라고 외치고 밖에 나왔다고 한다.


잔향

이수만은 잔향대마왕이라고 한다.

과거 현진영이 데뷔를 준비했던 당시 현진영이 젓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들어올리자 젓가락에서 다시 배우라고 말했다.

한번은 그룹 슈퍼엠을 기획해 멤버들에게 의견을 제시하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때 백현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자마자 전화로 3시간 반 잔해를 한 뒤 백현의 의견 를 기각했다고 한다.


미담

이수만은 작은 목소리와 별개로 직원을 잘 잡아준다고 한다.

연예인이 되기 전에 바다는 집의 사정이 어려웠고, 아버지의 건강조차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연예계 데뷔에 회의감을 느꼈지만, 이때 그녀의 어려운 사정에 접한 이수만이 병원비와 등록금을 모두 지원해 가수로 성공한 그녀가 이수만에게 감사를 표명한 바 있으며 현진영이 불법 약물투약 혐의로 빵에 들어갔을 때는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었다 현진영의 아버지를 위해 1억원이 넘는 돈을 대신 냈다고 한다.


탈출

이수만은 해외로 도피한 적이 있다.


1999년 주식상장을 준비하고 있던 가운데 11억에 달하는 공금을 횡령한 이수만. 당시 검찰이 이를 포착해 횡령한 돈으로 수백억의 차익을 얻어 pd들에게 금품 로비를 했다고 해서 이수만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했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점점 숨이 아프다가 이에 이수만이 곧 미국에 제대로 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인터폴 수배가 떨어지고 조건이 무효화되어 결국 4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수만. 재판 결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지만 사건 여파로 sm 주가도 개척살이 나빴다.

중국의 꿈

이수만은 심할수록 중국을 빨아 대중에게 비판을 받았다.


케이팝 피디가 중국에 진출하지 않으면 아시아 할리우드가 탄생할 수 있다며 케이팝 성공을 위해 중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수만…

이를 실천하려고 그룹을 만들 때마다 반드시 중국인을 합류시키고 있지만 막상 중국 멤버들이 인기를 얻는 것만이라면 곧바로 통수를 하고 탈퇴를 하고 있기 때문에 sm의 팬으로부터 중국병 환자에서는 없는지 그저 명예 중국인다고 하는 비판을 듣고 있다.


노예 개요

이수만은 노예계약에서 논쟁이 된 바 있다.


hot 재계약 당시 앨범이 한 장 팔릴 때마다 멤버에게 20원밖에 주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져 팬들로부터 방대한 비판을 받은 이수만.

HOT 멤버조차 SM을 나와 이수만에 대한 디스곡을 낼 정도지만 비슷한 논의로 동방신기를 나온 김준수가 어린 시절을 모두 이렇게 보낼 것 같아서 카마득이라며 SM과 이・수만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경영권

이수만은 현재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조카에 저격당하고 있다.


개인회사를 만들어 SM과 서비스 계약을 맺은 후 약 20년간 1400억에 달하는 돈을 손에 넣은 이승만. 결국 SM이사회 내부에서 불만이 나와 사모펀드의 아라인 파트너스, 카카오와 손을 잡고 이수만의 팽창계획을 실행으로 옮겼지만, 이때 반시혁이 등장해 이수만 fm 지분을 사들여 통수를 맞이하는 곳이었던 이수만이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에 다시 그를 인려고 이수만의 초조인 이성수 대표이사가 이수만이 홍콩의 개인회사를 만들어 탈세를 하고 있으며 그는 어느 시점부터 목재 재배 마케팅을 해 그러나 이것은 부동산, 카지노, 대마 합법화까지 이어지고 있다.

컴백을 준비하는 에스파이의 노래에 가수로 넣으려고 한 적도 있다는 폭로를 내세웠지만 현재 이수만은 폭로에 대한 해명 대신 목사가정에서 자란 부드러운 조카인데 마음이 아프다는 입장만 내놓았다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