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론 플라톤/소크라테스/정의란 무엇인가/산파술/내 무지를 알려준 책(인플루엔자/서평)
국가론 플라톤/소크라테스/정의란 무엇인가/산파술/나의 무지를 알린 책/내 인생을 유일한 한은 소크라테스를 늦게 만난 것/지구상 최고의 철학자/부각이 된다 출판사
안녕하세요.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국가론을 읽고 무릎을 꿇는 독서 블로거
단풍 마을입니다.
오늘의 감상평을 쓴 책은 플라톤의 국가론이라는 책입니다.
책에는 플라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플라톤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입니다.
책의 주인공은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와 다른 등장 인물들이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을 대화체로 담은 책입니다.
일단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내용이 너무 쉽게 작성된다는 것입니다.
가독성이 매우 뛰어난 책입니다.
고전인문학을 즐기는 분은 스스로 사색하고 탐구하는 과정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인문을 건드렸을 뿐이 아닌 분은 그런 과정이 힘들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으면, 소크라테스는 산파술로 고추를 잡고 4색의 방향과 깊이를 안내해 줍니다.
그 점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이론
독감/서평
나는 독감을 쓸 때 인상적인 시를 확인하고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쓰는 습관이 있습니다.
다른 책도 마찬가지이지만,이 책은 그 부분에 더 신중했다.
읽어보면 실은 책의 내용과 그다지 다른 생각이 많지 않았다.
논리적인 말로 해결했을 때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말과 실제 상황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살아온 세상, 내가 아는 세상, 물론 나는 우물에 있는 개구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이해되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많았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옳은 일과 명확한 기준을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은 아마 머리와 실제 딜레마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진리를 탐구하는데 어떤 명제가 진리라고 해도 실제와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진실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책을 펼치면 정말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정의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부정을 행하는 것이 선, 즉 이익이며,
부정되는 것은 악, 즉 손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악이 선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래서 합의하에 계약도 맺기 시작하고 법도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란 일종의 타협책입니다.
불의와 불의의 타협책입니다.
옳은 일을 하지는 않지만 제재를 받지 않은 사람과 똑같은 일을 해도
보복하는 힘이 없는 사람, 양자간의 타협책인 것입니다.
이상적인 나라를 논한 이유는 소크라테스와 사람들이 정의를 논의하도록 전개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된 사람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된 국가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고 한다.
개인은 국가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한 국가 중에서는 개인도 정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 같다.
책을 읽고 내심 놀란 부분은 “시대에 관계없이 인간은 모두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에 대해 논하고 싶다는 욕구가 높아진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만 정상과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 일이며, 옳은 것은 「선」이며, 「선」을 실시하면서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누가 ‘선’을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상기를 말한 사람은 「그라우콘」이라고 하는 인물로 소크라테스에게 상기와 같은 이유로 정의를 정의해 달라고 요청한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정의하는 방법은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의를 정의하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그 과정을 하나하나 보는 것은 정말 경이적이었다.
책의 한 줄 한 줄이 깨달음의 장이었다.
그 엄청난 기회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 자발적으로 정의를 지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안전하게 부정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악행을 저지른다.
(중간 생략)
한쪽은 선함의 극단에 놓고, 다른 하나는 나쁜 극단에 놓았을 때,
과연 누가 더 행복한지 우리는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도 훌륭하지만, 그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의 말도 매우 좋다.
명쾌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명쾌한 질문을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명쾌한 대답을 하는 사람에 가까우면, 소크라테스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명쾌한 질문을 하는 사람에 가깝다.
“안전하게 부정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악행을 저지른다.
”
나는 이 말에 감탄했다.
사실, 2,000년 전의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없다.
지금도 사람들은 항상 악행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슴 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타인의 행복과 기회를 빼앗는 사람이 있다.
만약 세상에 정의가 없다면, 나는 삶의 의미를 잃는 것 같습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악행으로 부를 축적하고 선행하는 사람보다 행복한 삶을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세계를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제대로 세상을 사는 방법보다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가는 방법을
교육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도 그런 꿈을 꾸고 진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행복한 삶을 보내는 것이 목표라면.
좋은 것들 중에는 해로운 일이 없습니까?
유해하지 않기 때문에 해를 끼칠 수 없을까?
해를 끼칠 수 없는 것이 나쁜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나쁜 일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까?
아울러 라인은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익한 선은 곧 행복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좋은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고 단지 좋은 것의 원인이 아닐까요?
좋은 것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증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읽으면서 계속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순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고의 차이나를 보는 시선에 따라 말이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에 있던 행인을 돕는 행동은 ‘선’이다.
「선」이므로 유해하지 않다.
이런 선행을 하는 사람의 행동은 선이므로 유해한 일은 없다.
그러나 만약 도움이 된 행인이 도움을 준 사람을 범인으로 지적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내 지인이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
분명히 「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유해한 일이 되었다.
원인이 좋은지 결과가 나쁘다면 정말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악행이며, 그러한 사실을 숨기는 것도 악행이다.
그럼 숨기지 않는 것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다.
선행을 하기 위해 불륜을 저지른 남자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그것은 선행이다.
그 결과, 불륜을 저지른 남자와 그 아내는 이혼을 하고, 가정이 파탄했다.
이러한 결과는 유익한 결과입니까? 유해한 결과입니까?
나는 책을 읽고 이렇게 반문이 계속 들렸다.
나중에 이러한 반문은 매우 깨끗하게 해소되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리고 싶다면 끝없이 내려갈 수 있는 이런 질문을 어떻게 명확하게 해소할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기회를 빼앗기 위해 말을 아끼려고 한다.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지 않는 한,
또는 통치자가 철학을 공부하고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이상 국가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상적인 나라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거나 통치자가 철학을 공부하고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자마자 들은 생각은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였다.
그러나 나는 빨리 주의했다.
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근원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시작된 것임을.
그리고 나는 철학이 무엇인지 분명히 모른다.
내가 분명히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진실의 탐구의 시작이며 진정한 배우기의 시작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사랑한다면, 그 중 일부만을 사랑할 것인가,
모든 것을 사랑할까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만 봐도 그건 알겠네요.
그는 온갖 구실을 붙여 술을 마시려고 노력한다.
애호가가 알코올을 사랑하는 것처럼,
철학자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다음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
어떤 지혜는 사랑하고 어떤 지혜는 사랑하지 않습니까?
모든 지혜를 요구한다고 보아야 할까요?
그러므로 숨어 지식을 습득하는 자를 우리는 철학자로 볼 수 없다.
어떤 학문에서도 선택하지 않고 맛보고 싶은 사람,
이런 자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진정한 철학자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진정한 철학자란, 어떤 학문이라도 선택하지 않고 습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철학자라고 한다.
또 그러한 사람이 국가를 통치하지 않으면 이상적인 국가가 된다고 한다.
일단 이 부분에서 많은 질문과 반문이 솟아오를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일단 그런 부분은 잠시 접을 수 있습니다.
국가론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사람은
우리가 잊어야 할 것도 모두 가지고 일어나 소크라테스에 반문한다.
나는 반문하기 전에 어떤 학문도 선택하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동의한다.
그리고 나라뿐만 아니라 매우 소수라도 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읽자마자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한 명은 세종대왕이었고, 한 명은 연산군이었다.
아마 한국의 역사에서 지혜를 사랑한 군주를 들으면 단연 자세종대왕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학문을 가리지 않고 배우고 그 학문을 바탕으로 백성을 유리하게 하려고 죽는 날까지 노력한 인물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어라는 조선만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밖에도 많은 유익한 발명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세종대왕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이끄는 조선은 짧아도 이상적인 국가가 아니었을까?
한편 연산군은 세종대왕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물론 역사를 보면 연산군도 어릴 적에는 학문이 뛰어났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면서 욕망을 절제할 수 없고 결국은 욕망에 사로잡혀 폭군이 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연산군이 조선을 통치하면서 나라는 빠른 속도로 부러졌다.
그 결과, 연산군은 형제 중종의 반점으로 폐위했다.
연산군이 통치한 조선은 최악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역사를 되돌아보고 생각을 해도 소크라테스의 말은 거의 진리인 것은 틀림없다.
자유론에는 어떤 의견이 잘못된 말이라도 일정 부분의 진리는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의견이 비록 잘못되었다고 해도 역사를 되돌아 보면 그의 말은 거의 진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교육을 가제해 노예적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하지 말라.
어릴 때의 학습은 엔터테인먼트처럼 수행해야 하며, 그렇게 태어난 소질을 파악한다.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강하게 키워야 한다.
통치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우선적 과목이 있다.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나 자신의 계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국가론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과목을 확인하고 왜 그 과목을 우선적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시기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알아보면 좋다고 생각된다.
무려 2,000년에도 교육은 엔터테인먼트처럼 해야 하고, 노예 상황에서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스스로 즐거움을 알고 정진하지 않으면 생생한 소질을 파악할 수 있어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이라는 말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어떨까?
아이들은 마치 노예가 노동하듯 좀비같은 얼굴로 공부에 시달린다.
아니요, 올바른 대답을 찍는 방법, 올바른 대답을 신속하게 찾는 방법을 찾습니다.
박태환 선수가 수영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배운다면?
장미라는 선수가 역도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배운다면?
손흥민 선수가 농구 선수에게 축구를 배웠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대한민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스스로 진정한 교육이 무엇이고 진정한 인간상이 무엇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만 아이들을 명문대학으로 진학시킨다는 목표로 부모들의 경주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교육이 무엇인지, 진정한 인간상이 무엇일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아이들의 교육
진정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부분은 어쩌면 안타리의 질문에서 나온 안타리의 대답일지도 모른다.
한국이 저출산에 시달리는 이유가 아이들을 키우는데 필요한 양육비를 현실적으로 벌기 힘들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올바른 대답 일까? 그 양육비의 대부분은 사교육비가 될 것이다.
‘칼비테’라는 인물은 어린이 교육에서 매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칼비테는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가난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아이들은 엄청난 사교육에서 천재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아이가 없다.
차산의 꿈을 갖고 있는 나는 실은 무섭다.
진짜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내 욕심으로 아이의 길을 막고 어리석은 일을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부모님의 모습을 닮았지만 아이들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인가?
나 자신을 되돌아 보면, 하염없이 부끄럽다.
총 서평
국가론 플라톤/소크라테스/정의란 무엇인가/산파술/내 무지를 알려준 책/내 인생에 유일한 한은 소크라테스를 늦게 만난 것/지구상 최고의 철학자/부각 되는 출판사
고전 인문을 다가게 된 것은 2년 전이다.
이지성 작가의 에이트라라는 책을 읽고 처음으로 고전인문학에 다가가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공부를 멀리하고 독서에 다가갔다.
책을 읽을 때마다 지식문이 열리고 지혜가 늘고 있다고 느꼈지만 부족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내면이 만족할 수 없어도 충분히 채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 고전 인문을 다가간 후였다.
그러나 고전 인문은 그만큼 외로움과 어려움을 따랐다.
책의 내용이 어렵고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독서라는 습관도 잃는 곳이었다.
그런 가운데 국가론을 읽게 되었다.
물론 내용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대화체라는 방식과 간단한 단어 번역이 내 이해를 돕는 것이 좋았다.
국가론을 읽으면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알게 됐다.
어떤 사고가 건강한 사고인지, 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진짜 일이 무엇인가?
눈치채게 해주는 책이었다.
국가론을 읽기 전에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성분성처럼 지나가는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알리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노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가론을 읽으면서 드림물실동 내 지식이 조금은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장을 통과 할 때마다 내 무지를 깨달은 신비한 책
이상
무지한 독서 블로거
단풍 마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