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궁 – 덕흥대원군사당 명칭 고찰
대한경자년 05월 대원군 15대 손리학주쨩(氰)
오하라군 미야토쿠흥 오하라군 사당의 모습 – 도정궁의 후원에 위치하고 있다.
대원군궁은 제14대 선조대왕의 사친, 도쿠흥대원군의 사당으로, 도성서부의 인달방 사사동 동도정궁내의 후원에 있었다.
즉 사직단의 남쪽에 있다.
중종 아침에 왕자궁 50관의 저택(도정궁)을 선공감에 세워 선조 아침에 가묘, 오하라군의 사당, 오하라군궁을 우공감으로 세워 주며, 이때부터 저택과 가묘는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제13대 명종대왕이 후승 없이 승인하면 이복형 덕흥군(=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이 입승 대통(입)승 대통령 로 왕위를 계승하면 곧 14대 선조대왕이다.
명종대왕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1563년(명종18)에 13세에 별세했다.
선조대왕이 즉위 후에 1568년(선조1)상이 흥흥군부인 흥흥군부인 : 제14대 선조대왕의 4친덕흥대원군의 부인(하동부대부인 정씨를 말한다.
)의 소상 에 중사를 보내, 제사를 돕도록 했다.
1569년(선조2), 아버지를 북송, 영종, 황제의 네 부모, 복안의왕, 복황 조윤양의 고사로, 생부, 후흥군을 대원군으로 하여 생모군부인 군부인 하동정씨를 부대 부인으로서 추방해 봉작했다.
대원군 구궁(선조대왕의 잠저기)의 후원에 繕工監에 명령하여 가묘를 세워 신주 양위를 불천 지위로 했다.
나라에서 제사를 보내려면 황백부모를 칭하기로 했다.
1570년(가미죠 3)상이 이날이 도쿠흥군의 음일임을 이유로 어제와 오늘의 筓筵을 중지시켰다.
1576년(조조 9년) 7월에 임무라는 자가 상소를 제기하고, 현 부모에 대한 덕흥대원군의 호칭은 근거가 없기 때문에 고쳐 추궁해야 한다고 다시 논의했다.
1577년(선조 10) 4월에 대원 군각손의 세습하는 제도를 정했지만, 「대원군을 봉사하는 사람의 관작이 왜 4대에 머물 수 있는가. 이미 송나라의 고사에 의해 정해 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복왕의 세습한 예에 따라 관작을 정하는 것이 온화한 조치다.
예로 봉작하고, 그 후 적장수(봉사손)에게는 종친부군(군, 1품)으로 봉작하고 세습하라고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도녕 , 정삼품을 주고 세습시킨다.
그 후, 순조 아침에 다시 봉사손이 2품의 이상품계가 되면, 종친부군의 작위로 봉작해 봉사하게 했다.
또한 영양군에 아들이 없기 때문에 안소영(후창빈안)의 신주를 계후자(발고자) 흥녕군 이수정에게 봉사시킬 수 없다.
가묘로 옮겨 제사장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어떨까요? 또 이때 할머니 역의 안씨(나카무네 대왕 후궁)는 창희와 인사되어 창빈제사를 창희의 장남 영양군가(영양군가)에서 보내던 제사를 히메코의 흥녕 군 이수정에게 맡기지 않고 영양군 부인이 죽으면 오하라군 가묘로 옮겨 가와라군에게 봉사시켰다.
1577년(선조 10) 5월에 선조대왕이 4친대원군 양위에 친행(친행)을 시도했지만, 홍문관의 신하들이 릉으로 사묘에 제사할 수 없다며 선정신 구리타니 이준 선생님이 공조례, 학궁례, 가인 릉을 예로 들어, “조카가 삼촌에게 제사하는 예로 하면 무엇이 불가일까. 속유의 의리를 고찰하는 공부가 없고, 단지 임금 을 올리고 몸 아래를 누르는 것만을 예로 알고, 부모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은 모르고, 근거 없는 상담을 아낌없이 임금에 너무 화나게 한 거조가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슬퍼 그렇다고 해서 생부모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해져, 최종적으로 선조대왕이 즉위 10년 만에 대원군 희궁궁에 납입해, 선조대왕이 샀던 대원군의 부모님에게 친제 를 보내게 되었다.
이때 행례는 친척과 주다례를 했다.
이때부터 가묘(대묘, 오하라군궁)에 선조대왕 이하의 열성조가 등극하자마자 전복과 다례, 작헌례, 전작례(奠郌禮)를 실시했습니다.
국가에 의해 관리되었다.
숙종 을해년에 와서 이 의의는 국가사전인 국조속 오례의에 등록되어 정조 아침에 와서 대원군묘기), 작헌례의 (묘소수 개행 모의)가 국가사전(춘가 통사전) 춘관 통고에 등재되게 되었다.
현재 이러한 의례는 국가사전국조속의례의, 춘관통고, 태상지, 의주등록(의주등), 제물등록(제물등), 사묘의궤, 궁축식, 대한민국 예전에서 찾을 수 있다.
1658년 (효종 9) 우마시로 히로시가 창희안씨의 5세가 지났지만 아직 신주를 교천하지 않는다고 상소했다.
우암송시열 선생님이 ‘아레기’를 ‘창빈이 왜 장경·문정 2왕후와 같은 5대가 되어 등급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작지 않기 때문에 감히 진행합니다.
그리고, 동춘당의 송중길 선생님이 알레기를, 「하나님의 의미에서는, 이것은, 쌓아의 구분을 가지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국가의 일이며, 한편으로는 개인의 일이므로, 섞어서 논하는 것은 온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통상, 나라에서 공신을 취급하는 것이 대단한 후에 자손들에게 백세기 정도 불천을 피합니다.
경우 성찬을 낳은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왜 공신을 다루는 토리이에도 미치지 않을까요. 창희안 씨가 이때 불천 지위가 됐고, 효정조 대원 군묘에는 불천신위 3위(장빈안 씨, 도쿠흥 대원군, 하동부대 부인)가 됐다.
1734년(영조 10) 덕흥대원군 묘사에 전복하는 절차를 명했다.
왕이 덕흥대원군의 묘사를 거꾸로 전쟁했지만, 그 《의주(義註)》는 다음과 같았다.
幄次를 묘문 밖에 설치하고 전배하는 위차는 묘사의 전각 중앙에서 북쪽을 향한다.
왕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어 출궁시와 환궁시는 백관이 흑단 영모로 지영(지영)·지송(사송)한다.
전후의 고부키는 출궁할 때는 진설만으로 연주하지 않고, 전궁할 때는 연주한다.
오마가가 동쪽 출입구에 이르러 가로에서 내려 오가마를 타고 【길이 좁기 때문이다.
는 재사기를 행하고 의식에 따라 봉심한다.
종신 2원이 가을해년(1695, 숙종 21)의 전례에 근거를 둔다.
그리고 곧바로 묘사의 문을 닫는 것은 창주의 신주가 있기 때문이었다.
)에 쏟아진다.
출궁할 때와 전궁할 때에는 주인 이하가 흑인영 모습으로 문 밖으로 나아가 지영·지송하고 전복할 때에도 입시한다.
왕이 전배를 마치고 유령에 들어가서 하교하는 것을 “전괴만 가서 술 한 잔을 올릴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너무 시원하다”. 그리고 이어서 해조에게 명령하면 태일로 함평군홍을 보내 대원군과 창희에게 제사시키고 제문의 두사(두패)를 을해년의 전례에 따라 ‘국왕(國王)’ 는 앞으로 신하를 보낸다”는 사정으로 했다.
1758년(영조 34) 영조대왕의 특명으로 하원군의 虡號를 의헌에 내리고, 사당에 치구시켰다.
1771년(영조 47) 영조대왕이 하와라군은 본가에 대하여 시조가 되기 때문에, 왕자의 부조지위가 아니어도 이후, 부조지위에 제사를 받는 것을 요조에게 자세하게 알리라. 용조조에 와서 ‘대원군묘’에는 불천신위 6위가 되어 1묘 3실이 되어 왼쪽에서 창주묘, 중대원 군궁, 오른쪽의 분개묘에 하나의 정당에 3각실 되었다.
덕흥대원군의 사당 명칭은 처음으로 창건 당시 선조대왕은 가묘로 불렸지만, 조상 10년 5월 호봉이 대원군묘를 가묘로 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논란이 되었다.
이때 호봉은 이렇게 주장했다.
“명칭이 올바르지 않으면 말이 무리가 되어 백성이 손발을 둘 수 없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대원 군묘를 별명 가묘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어떤 명칭입니까? 나라에 어떻게 가묘가 있습니까? 다만 대원군묘라든가, 나 친묘라든지 해야 합니다.
했다.
옥의 김우영은 알라에스트를 말했다.
예문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오른쪽 사에서 널리 고증하실 수는 없지만, 허봉의 말씀은 일반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니, 조상대왕이 화난 목소리에 이르듯, “호봉이 굳이 혼자 굉장한 이야기를 했지만, 옛 사람도 말을 들고 의미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묘 또 무엇이 유해한가? 했다.
이때부터 덕흥대원군의 사당 명칭의 가묘에서 사묘, 오하라군 사우(대원군사우), 오하라군묘(대원군묘), 오하라군묘우(대원군묘우), 덕흥 절(德興祠), 조선왕조실록 경조실록에 단 한번 나왔다), 도쿠흥대원군묘, 도쿠싱대원군 사우(德興大院君祠宇), 도쿠싱대원군사(德興) 대원군사) 등으로 불리게 되어 정정조조조에 국가사전 춘관통고 및 친행각의에는 ‘대원군묘’로 등재되어 ‘대원군묘’로 덕흥대원군 사당 명칭과 불리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고종 아침 이전까지 도쿠싱대원군의 사당 명칭은 ‘대원군묘’가 정식 칭호로 볼 수 있다.
고종아침에 와서 도쿠흥대원군의 사당명칭이 ‘대원군묘’에서 ‘덕흥궁’ 및 ‘덕흥대원군궁’으로 불리며 국가사전(국가사)전 태상지에는 덕 흥궁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사묘의궤와 승정원 일기에는 ‘덕흥대원군궁’으로 등록되어 있다.
향후 덕흥대원군사당의 명칭은 ‘대원군궁’으로 불리며, 덕흥대원군의 종가는 ‘도정궁’으로 불려야 한다.
그리고 대원군궁에는 불천신위 6위를 모시던 사당이다.
1묘 3실로 되어 있어, 1개의 사당에 감실은 3개로 되어 있어, 1묘 삼묘제이다.
전체적 권역은 「대원군궁」이지만, 그 중에 사당은 각각 창희안씨 사당은 「창주묘」, 도쿠싱대원군의 사당은 「대원군궁」, 하원군의 사당은 「 의헌묘(懿獻廟)다.
현재 덕흥사라는 명칭은 1950년대 도정궁 후원에 있던 대원군궁에서 모셔진 불천신위 6위를 남양주시 성내동 덕릉촌에서 덕흥대원군 묘소재 방 「수락산방」에서 이안(영안봉묘)하면서 현재는 재실이 묘당이 되어 「덕흥사」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이것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덧붙여서 덕흥사라는 명칭은 경종조에 조선왕조실록, 쿄조실록에 단 한번 나온다.
향후 덕흥대원군의 사당은 ‘대원군궁’이며 종가의 종택은 ‘도정궁’, 묘소 재실은 ‘수락산방’으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