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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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1

1986년 4월 26일에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 주 프리피야트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 사고레벨 7등급 인류사상 최악의 원자력사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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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대피, 준비
2.데미지
2 – 1. 인명 피해
2 – 2. 주변 지역의 피해
2 – 3. 주변 국가의 피해
3. 사고 후

1. 대피 그리고 준비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있는 도시 프리피야트에는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그들의 가족 등을 포함한 5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특히 100km 이내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수도 키예프가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사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피폭했다.

이 시기에 체르노빌은 보통
북풍이 불이 사고 때 남풍이 화재로 인해 체르노빌 남쪽의 키예프는 비교적 안전했지만 체르노빌 북쪽 벨로루시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사고 발생 당일 방사성 물질이 북쪽에서 멀리 스웨덴까지 날아갔지만 시위를 무시하는 바람에이 소문 유럽에 무늬 퍼진 뒤 사고 소련은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낙진은 전 유럽을 감싸고 덮고, 필기 바람타고 멀리 일본 그리고 홍콩에도 이 사고의 낙진이 떨어졌다.

그보다 가까이
중국그리고 한국심지어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북미/남미/아프리카 같은 지구의 반대편 남반구를 제외하고는 모조 낙락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고 첫날의 방사선 누설량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측정 가능한 최대값이 매우 낮고 현장에서 측정된 최대값(약 3.6 X)을 기준으로 보고했다.

프리피야트에 파견되어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있던 병사들의 책임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상승하는 방사선량에 경악하고, 높은 사람 역시 이 보고를 받아 경악했다.

그 후, 레가소프의 지적대로 대형 측정기를 가져와 측정한 결과, 방대한 수치가 나온 것(약 15,000 X). 그리고 26일 밤에 원자로에서 다시 대폭발이 일어나 꽤 많이 누설된 상태였던 방사성물질의 누출량이 더욱 크게 늘어나고 이에 따라 소련 당국도 주민을 피난시키기로 결정했다.

사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군부대와 경찰, 소방관 등 수십만 명의 인원이 근처에 투입돼 사람들을 피난시켰다.

처음에는
프리피야트라고 체르노빌, 그 인근 지역 주민만이 피난시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험 지역은 점차 확대되었기 때문에 4월 30일부터 추가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발전소 주변 30km 이내의 주민 전원이 철수해, 방사성 물질이 대량으로 살포된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이 종료한 것은 8월이었다.

당시 매우 번영했던 도시 프리피야트는 이 사고로 인구 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도시를 한 아침 모두 떠나야 했다.

현재 가장 유명한 유령도시로 알려진 지금은 모든 잡초가 자라며 야생동물이 돌아다니고 있다.

소련 당국은 제염작업을 위해 전국의 방사선방호복을 긁어 모았지만, 방사선방호복은 비싼 위에 만드는 것도 어렵고, 인재에 비해 훨씬 부족해 일부 회복인력 밖에 입을 수 없었다.

시간이 다가오던 소련 당국은 어쩔 수 없이 화생방호의나 우의에 납을 기울여 만든 임시방호복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련 당국은 아이오딘 131
에 대한 보호를 위해 부부에게 아이오딘이 추가 보드카을 많이 지급했다.

이러한 조치는 갑상선 부위에 아이오진을 과포화시켜 갑상선이 방사성 아이오진에 오염되는 것을 막는데 분명히 효과가 있었지만, 아이오진 이외의 다른 방사성 물질은 막을 수 없었다.

과학자와 기술자가 수습을 위해 머리를 짜내고 흙 끝에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지역은 무늬를 부수고 평평하게 한 후 콘크리트로 2m 이상 덮고 오염된 원자로는 초대형 커버를 덮은 후 10년 정도 지나면 해결책이 나올까?「이었다.

즉, 지금의 기술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한 번 뚜껑을 덮고 봉인해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5년 8개월만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다른 나라로 나뉘어 버렸다.

이 계획은 10년이 경과하기 전에 파기되었다.

뭐 그렇다면 소련이 여전히 건재했다고 해도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 발생 후 36년이 지난 현재까지
폐연료를 처리하는 기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2.데미지

2 – 1. 인명 피해

  • 알렉산더 스도드로 비치 아키모프
    선임 연구원으로서 동료의 레오니트 토토노프와 함께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미지의 이유로 원자로 비상 정지 버튼(AZ-5)을 작동시켰지만, 당시 그들이 몰랐던 제어봉 설계의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원자로가 과부하를 일으켜 폭발했다.

    사고 직후 14명의 소방관을 지휘하여 화재진압을 시도한 후 토토노프와 함께 원자로 부근의 냉각수 밸브가 있는 곳으로 가서 방대한 양의 방사능을 덮고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밸브를 작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자로는 이미 파괴되어 있어 원자로에 통하는 냉각수 배관은 대부분 충격으로 파괴된 후 냉각수 밸브를 작동시켜 보면 쓸데없는 일이며, 결국 톱 투노프와 함께 추가 적으로 피폭해 쓰러진 채 소방관에게 발견되었다.

    이후 아키모프는 톱투노프와 함께 병원으로 옮겨진 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범인으로 손가락을 당기면서 비참한 마지막을 맞았다.

    아키모프는 15시벨트 이상의 방사선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쌍둥이가 동생으로부터 골수 이식을 받았지만, 과도한 피폭 때문에 효과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라고 반복했다고 한다.

    포스트 컨테이너의 칭호가 수여되었습니다.

  • 발레리 이리치 호뎀추크
    순환 펌프 기사. 이것은 사고의 첫 번째 죽은 사람입니다.

    사고 당시, 아나트리·달트로프의 지시에 의해 메인 순환 펌프 엔진실의 일단에서 순환 펌프를 작동하고 있지만, 펌프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증기가 새기 시작하는 상황을 목격해, 아키모프에 보고하려고 하는 순간 원자로에서 폭발 이것이 일어났다.

    그는 폭발에 직접 휘말려 곧바로 붕괴된 발전소의 외벽 잔해에 묻혔다.

    호담추는 폭발로 즉사한 것으로 추측되며 폭발한 원자로에 너무 가깝고 메인 순환펌프실은 완전히 무너져 매몰된 상태이므로 현재도 유해를 수습하고 있지 않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무덤은 시체가없는 가문이며 원자로 3 호기와 4 호기 사이의 공간에는 그 영웅으로 칭찬하는 위령비가 만들어져 매년 유족이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한다.

  • 발레리 페레보스 첸코
    사고 후 댐트로프의 지시에서 알렉산드르 쿠드자프, 빅토르 프로스크라코프와 함께 원자로에 제어봉을 수동 삽입하기 위해 원자로홀에 들어가 폭발한 원자로를 확인하는 동시에 피폭했다.

    그 후 그는 친구인 호담추를 비롯한 동료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6주 후에 사망했다.

  • 이반 오를로프
    원자로 제어를 시도하는 피폭되어 사망.
  • 바실리 이바노 비치 이그나텐코
    사고 직후 투입된 14명 소방관 중 하나. 계급은 중사. 발전소 지붕과 원자로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해 노출된 원자로의 노심에 가장 가까워진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14 시베르트 이상의 치명적인 방사선에 노출된 그는 곧 매우 심각한 급성 방사선 증후군(ARS)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고 프리피야트 병원에 잠시 머무르는 모스크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2주 후 1986년 5월 14일에 ARS 합병증.
    링크에 따르면, 피폭 후 입원 한 이그나 텐코를 만나기 위해 당시 임신 안에서 문병이 불가능했던 아내 루드미라 이그나텐코는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 둘이 있고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고 허가를 받아 입실했고 남편이 죽는 그날까지 병실에 함께 있었다.

    이때 “남편과의 신체적 접촉(키스나 포옹 등)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루드미라도 방대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었고 태준의 딸 나타샤는 더욱 영향을 받았고 선천성 심장기형과 간경변으로 인해 태어난 지 5일 만에 사망했다.

    # 루드미러도 피폭으로 무사히 할 수 없었고, 2년 후에 급성뇌출혈로 쓰러져 겨우 생명을 구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따르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제대로 떨어지고, 피부는 점점 벗겨져 입안에서 간 조직과 폐 부분을 계속 토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고선량의 방사능피폭 후 염색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몸이 정상적인 세포분열에 의한 회복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온 몸의 조직이 괴사해 나가는 것. 도카이무라 방사능 누설 사고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 수 있다.

    2019년 12월 BBC에서 아직 생존중인 루드미라와 이에 대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생전의 바실리 이그나텐코는 꽤 체구가 크고 몸이 튼튼했다고 한다.

    류드미라와의 결혼 사진이나 형제들과 찍은 사진을 봐도 한눈에 봐도 체구가 크고 확고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선량의 방사능피폭 앞에서는 이 튼튼한 체구의 청년도 별로 없었다.

  • 블라디미르 샤셰노프
    자동 시스템 엔지니어로 사고 당시 604호실에 있었다고 한다.

    604호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폭발로 고온의 냉각수와 증기를 뒤집어 쓰러진 기둥에 깔려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졌다.

    바닥에 고인의 물에 몸이 절반 젖어 입에서 피규어를 불어내는 상태에서 동료에게 발견된 그는 프리피야트 병원에 보내져 즉시 치료를 받았지만, 척수 파열, 전신 화상 및 내장 부상으로 사고 당일의 1986년 4월 26일 5시 또는 6시에 35세에 사망했다.

    당시 목격자들에 의하면 병원에 후송되고 있던 사이에 「거기, 발레리가… 는 원자로에서 왔다고!
    ” 발레리 호뎀 추크와 함께 폭발로 인한 초기 사망자 중 한 명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올렉 겐리프처럼 폭발로 수증기를 뒤덮어도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

다만 올렉겐리흐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부상으로 2명, 방사선피폭으로 2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투입된 인원 중, 이 중 25,000여명이 사망한 것이 되고 있지만, 이쪽은 정말 방사선을 위해 사망했는지 확실하지 않고, 비공식 집계로서 남아 있다.

당시 피폭 인원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피해가 있는지 모르는 애매한 저수준으로 피폭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 정부는 제한된 사람들(주로 공산당원 중심)만을 치료해주고, 어린이 인격으로 데이터를 해석했다.

냉전시기의 소련은 사고 피해를 줄이고 자료를 숨길 뿐이었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소련에서 나오는 자료만으로 사고 경위나 피해를 말 그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축소된 자료를 다시 의도적으로 부풀려 맹목의 코끼리를 따라가도록 실제 피폭자를 추정해 보면 결과물의 정밀도가 엉망이 된 것. (예를 들어 자연사망한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조차 피폭으로 죽었다고 카운트)

이 대형 사고로 인해 지금까지도 이 발전소 주변 지역이 몬탄 출입 금지 지역에 묶여 있다.

슬리마일에 이어 체르노빌 사고로 원자력발전소는 대표적인 피난시설이 됐다.

또한 디스커버리드 큐멘터리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사고 당시 프리피야트는 물론 키예프도 정상치보다 수천배는 높은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국은 향후 5월 축제(5월 1일 국제노동절, ​​5월 9일 대조국 전쟁 전승절)을 준비하기 위해 이 사실을 숨겼다.

체르노빌 사고로 현장 지휘를 받았다.

발레리 레가 소프 역시 높은 분들에 의한 강압과 정치적인 힘에 밀려 유엔 사고 청문회에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소련 정부에서 날조한 가짜 결과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후 전세계 인류와 사고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 얼굴을 꼽을 수 없다고 죄악감에 시달리고 자살한다.

이때 원자력사고 수습 과정에서 레가소프도 피폭의 영향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과 과학자로서의 양심, 죄책감에 죽기 직전에 모두를 폭로하는 목소리와 자료를 일괄 공개해 곧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각 단체마다 사망입증과 집계방식, 그리고 기준이 천차만별이므로 정확한 피해수치 통계는 모른다.

본 문서의 설명에서는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의 2011년 보고서에 의한 83만명의 노동자를 피폭자 기준으로 한다.

83만명이 아닌 다른 기준을 쓸 수도 있다.

연간 평균적으로 130~17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계속 피폭된 작업 초기 1986년부터 1987년 사이에 누출 방지와 누출 방사능 처리 작업에 투입된 해체 작업자 22만6천명 를 기준으로 보기도 한다.

(EXPOSURES AND EFFECTS OF THE CHERNOBYL ACCIDENT, 526페이지)

그래도 추적 조사를 전혀 하지는 않지만 2012년 11월 8일, 미국에서 사고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에 대한 추적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자세한 것은 관련 뉴스 단락을 참고로 하면 된다.

이러한 조사는 2021년에도 다시 이루어졌지만 미국 국립암 연구소 예거 박사팀은 체르노빌 사고 청소에 동원되어 방사능에 노출된 105명과 자녀 130명을 조사한 결과,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아이도 방사선에 의한 유전자 변이는 동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지하 콘크리트 층이 관통하는 수준입니다.

멜트스루는 피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까지 가면 지하수가 오염되어 희생자수는 수십배나 늘었을 것이다.

한편 위의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바실리 이그나텐코 등 피폭 피해자는 죽은 후에도 그렇게 편해지지 않았다.

심하게 피폭한 관계로 그들의 시신도 심각한 수준의 ‘방사성 폐기물’이 되었기 때문에 납으로 만든 관에 안장을 한 후, 용접하여 콘크리트로 구덩이를 채우는 형태로 채워야 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이 사건으로 10만건 이상에 달하는 낙태 수술이 이루어졌다.

2-2 주변 지역의 피해

체르노빌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고, 주변 마을들도 완전히 비워졌다.

이때 많은 땅에서도
방사능이것이 검출되었지만, 향후 바람을 타고 퍼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트랙터를 사용해 토지를 분쇄해, 아래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흙을 퍼 올려 덮어 버렸다.

주변의 숲도 같은 이유로 갈아입으려고 했지만, 시간과 인재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단지 출입 금지 구역에만 지정되었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 도시가 되었지만, 2003년 체르노빌 회복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어 관계자가 들어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관람도 여기에서 출발.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로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하늘 상태이므로 유령도시에 가까운 상태다.

2-3 주변국의 피해


주변 국가들도 무지하게 피해를 입었다.

한 번 벨로루시그러면 소아 갑상선암의 발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하필이라면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벨로루시에는 이 사고 침체의 80% 정도가 떨어지고, 지금도 벨로루시 국토의 33%씩이 되는 곳이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액세스 금지 구역이다.

2019년 기준으로 국토의 22%는 오염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벨로루시의 국토개발계획에 심각한 장애로 남아 있다.

이 가난한 땅
루카셴코 정부는 낙농업 중점지역으로 할 계획을 추진했지만, 차분한 벨로루시경제사정 탓인지 관련 연구자들은 벨로루시가 국민을 방사능발암 물질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성토하고 있다.

영국이나 스웨덴 동일 유럽의 반대편에서도 토양의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었다.

특히 영국 일부 지역은 이때 사고로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탈리아산 파스타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고, 일본에서 수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한국도 이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 20~30대 중 갑상선암 발병률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방사능량이 미소하고, 갑상선암 발생률의 증가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건강에 대한 관심과 검진률의 증가가 원인이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그다지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이 당시의 방사능에 대한 규제조치가 약했기 때문에 남양유업그리고 한국 야쿠르트를 비롯한 다양한 식료품 회사로부터 방사능 과잉 검출로 폐기 처분되는 분명한 유럽 국가의 폐기 농산물, 유제품을 수입하여 분유, 커피프림, 라면, 사료 등으로 가공해 팔린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1980년대 말에 미디어에 보도되었지만, 어떤 영문인지 모르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우지 파동이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처럼 공론화할 수 없어 흐릿하게 전달했다.

이 사건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야생동물의 뼈와 뿔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독일 같은 경우 방사능으로 오염된 사슴이나 멧돼지잡았을 때 정부에서 돈을 지불하고 회수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사슴의 경우 한약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녹는에 방사능이 쌓이기 때문이다.

서쪽 세계,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도 체르노빌 사고가 너무 큰 피해였기 때문에 자국의 원전 반대 여론과 집단 패닉 사태를 우려해 사건에 대한 진상을 숨겼다.

체르노빌 사건 관련 자료는 당시 곧 발표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혀 있어 2000년대에 들어야만 관련 자료가 공개됐다.

사고 후

https://youtu.be/vkUI_UpKwag

https://youtu.be/slZvAk74Ww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