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야합니다.
왜 사원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 스스로 묻고 어떤 의지를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삶이 개선됩니다.
인생을 개선하지 않고 종교 행사에만 참여해도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에 유의하십시오. 무엇을 위해 내가 절에 나가는지, 무엇을 위해 내가 교회에 나가는지, 그때 그때, 냉엄하게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적인 타성에 젖어 신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어리석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자신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행복과 불행을 타인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순간 순간 맑은 정신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과 불행에 노출되지 않고 염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깨어나면 수많은 영적인 스승이 말하는 것입니다.
각성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항상 지켜본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으면 통증과 불행이 생기지 않습니다.
수행의 첫 번째 과제는 자신이하는 일을 항상 조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의 참배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참선과 불불, 간경(독경, 성전을 읽는 것)을 통해 자신을 주시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펴보면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고통에 몰려 들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힘과 지혜가 그 안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켜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수록 살아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모두를 내려야 할 때가 꼭 방문합니다.
그때 가서 아쉽고 망설이지 않고 아래에 둔 것을 미리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리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며 정진입니다.
단지 물건이나 생각을 내리는 것에서 벗어나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서 일어나서는 수행해야 합니다.
인생 자체가 수행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환생하고 성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험한 세계를 살아가는데 지혜와 용기가 태어나 일소되지 않고 깨어 있는 정신에 나설 수 있습니다.
자기 전에 자신의 삶을 확인하십시오. 오늘의 하루, 나는 무엇을 했는가? 오늘 하루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내 삶의 안전에 무엇을 축적했습니까?
이렇게 점검하면 하루 종일 생활이 결코 무시되지 않고 매일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은 화제를 가지고 낭비로이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살아있는 화제를 가지고 정진해야 합니다.
볼리심이 살아 있기 때문에 꾸짖는 화두를 통해 수행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실행하는 사람, 특히 참신한 사람, 불꽃 또는 기도하는 사람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절실하게 하는 것이 보리 마음을 발하는 것일까? 내 연습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올바른 실행입니다.
혼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닙니다.
난 항상 잊지 않을거야. 나는 과연 출입하고 출가 수행자답게 살고 있는가? 마음의 말이 수행자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인가? 또한 내가 무엇을 위해이 길에 들어갔습니까?
구도자는 이러한 자기 반사로 순간 순간 깨어나야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본래의 자기로서 언제나 깨어있는 것입니다.
연주자에게는 나이가 없습니다.
항상 그 자리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노인과 죽음이 있지만 수행에는 노인이 없습니다.
언제나 깨어 있기 때문에 세월이 비어 갑니다.
절실한 소망과 엔, 행이 없기 때문에, 세월이 거기에 용기가 있어 안주하는 것이며,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에는 세월이 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초심, 시작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초심이 중요합니다.
집을 떠날 때의 첫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월이 붙지 않습니다.
좌선은 전방에서 승려들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은 모든 불교도의 기본 자세입니다.
부처님의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기본 실행입니다.
좌선은 다시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큰 환희의 법문입니다.
아무런 잡념도 없이 우리가 부처님처럼 앉아 있는 이 자체가 큰 대안락의 법문입니다.
때 묻지 않는 청정법신의 모습입니다.
반복합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다시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노력하고 실행하는가? 본래의 밝기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닦지 않으면 오염되기 때문에 성장 노력을 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물들기 때문입니다.
작년의 여름, 나에게 가장 보람이 있어 즐거웠던 시간을 들으면, 아침 저녁에 시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시간입니다.
책을 읽고 밖으로 나가서 일하는 시간은 부수적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오가와의 소리에 귀를 맡기고 조용히 앉아있을 때가 가장 기쁜 시간입니다.
이것을 선열 위식이라고 하지만, 선의 기쁨으로 밥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불자들은 그러한 수행을 반드시 하는 기간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교 수행자의 기본 자세입니다.
이러한 자기 충전을 통해이 어려운 세계를 무난하게 극복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기 충전 시간이 없으면 언제나 중생 놀고, 여기에 팔려 거기에 노출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충전 시간은 곧 자기 중심 시간입니다.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할 수 있다면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실행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보살행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행보심과 보살행입니다.
행의 궁극의 종점이 곧 깨달음입니다.
죄송합니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그 행의 결과로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일은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닫는다는 사실입니다.
행 안에는 이미 깨달음이 있습니다.
마치 과일 속에 씨가 들어있는 것처럼.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날 새벽 별을 보면 갑자기 사람이 바뀌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순간 순간 새롭게 눈치채는 것입니다.
무명의 구름에서 벗어나 맑은 하늘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무엇을 위해 왔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스님인지, 일반 신도인지, 불교에 귀의하고 나이가 들었는지, 몇 년이 되지 않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불제자로서 얼마나 자비를 갖고 있는지, 그 자비를 인생에서 어떻게 실천하는가이다.
마음의 공부란 무엇인가? 기도, 자선과 간청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절실한 소원이며 수행입니다.
이런 수행을 거치면서 사람은 인간답게 성숙해 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라면, 그 사람은 전혀 성장하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디디는 것입니다.
각각 한 번 들어주세요. 나 자신, 자아의 실현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루 종일 내 인생을 소비하고 살고 있지만, 과연 자아 실현을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참배나 기도는 타인에게 보이는지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비밀로 해야 합니다.
많은 가운데 섞여도 은둔자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한 명의 기도를 조용히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기주의는 실행이 아닙니다.
종종 기도할 때 보면 혼자 소원을 다하듯 탐욕스러운 맹렬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좋다는 기도 장소에 가 보면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더럽습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혼자서 축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서투른 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입에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열심히 부르면서도 자신이 직접 그런 보살이 될 것이라고는 모른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특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나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장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입에서만 관세음 보살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관음의 화신이 되어 주세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지장보살이며, 극단적인 자비가 관세음보살입니다.
마음 밖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진지하게 기도하는 주체인 진심으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기도와 명상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위해 사원이나 교회에 나올 때 법정이나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야 기도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집을 나갈 때부터, 또 차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기도하고 명상해야 합니다.
시간에 쫓기자마자 사원에 가야 한다.
문을 나올 때부터 기도가 되어 명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명상은 특정 장소나 정해진 시간만이 아닙니다.
안팎이 일관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명상이 끝난 후에도 일관되어야 합니다.
대체로 보면 방선(참선을 쉬는 것) 시간에 뒤 방에서 잡담을 합니다.
기도가 끝난 후 기도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르게 처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행자는 이런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구도의 길도 바람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끝없이 찾아내는데 있어서 인생의 의미를 거듭해 굳히는 나그네길.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도 있듯이, 날마다 새롭게 피는 새로운 날이어야 합니다.
물도 바람처럼 흐르지 않으면 살 수 있습니다.
운수라는 말에는 하나 하나 무리없이 부담없이 걸어 다니면서 살아가는 의미보다 항상 살아 움직인다는데 본질적인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선이란 밖에서 얻은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철저한 자기수험을 통해 자신 속에 자고 있는 무한한 창조력을 깨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선을 가리키고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이다.
이 무한한 창조력이 사랑이라는 온도와 지혜라는 빛으로 이웃에게 발휘될 때 선은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우리가 혼자 있다는 것은 완전한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과도한 접촉을 통해 혼자 있는 시간을 거의 잃는다.
제대로 꽂혀 있는 밀로 툭툭할을 몸에 익힐 필요가 있다.
뜻밖의 경지가 순수의식 상태가 아쉽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것은 보라색 외로움이 아니라 본래 자기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당당한 인간 존재입니다.
남자는 혼자 일 때 순수하게 된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궁리를 한다.
가장 옳은 것을 생각하고 깊은 것을 들여다보고 높은 것에 눈을 돌리게 된다.
또한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죽음이나 영원과 같은 비일상적인 것을 세게 된다.
나만으로 하루하루 죽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껍질에서 계란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정기를 취하게 된다.
내 인생에 성이 없을 때 입에 갈거야. 밖으로 향한 관심과 시선을 안으로 돌립니다.
묵은 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내 안뜰을 다시 경작합니다.
벽을 향해 허리를 똑바로 하고 묵묵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매우 편안합니다.
마음의 바다에 부딪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비웁니다.
비어 있어야 새로운 에코가 울립니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의 세계에 마음을 쓰고 그것을 둔하게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모두 우리 마음에 매료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머리와 입만 크게 열려 있습니다.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으로 팔을 짜는 생명의 빛을 잃는다.
따라서 대지와의 관계가 그리 멀어지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대지는 모든 생명의 근원.
선은 대지와 밀착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단련이다.
좌선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당당히 혼자 직립하는 모습. 다시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좌금 자체가 본래적인 자아의 살아있는 모습이며 대체악의 법문이다.
자신을 거듭해 구축해 가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실행자는 진정한 외로움의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외로움을 모르면 시간이 들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이 적어야 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말로 모두 쏟을 수 있습니까? 말이 많으면 마음이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안이 비어 있습니다.
여러 모순과 부조리와 갈등으로 얽힌 이 풍진의 세계를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말의 정신으로 항상 깨어나야 한다.
그런데 살아보면 일상의 타성에 젖어 약간 게으르기 쉽다.
그 타성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심히 정진하는 길밖에 없다.
안에 깊이 탐구하는 사람은 새로운 용수만을 찾아 무한히 헤매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 갈증을 면할 길은 없다.
일단 샘을 하나 찾아내면 그 샘에서 날마다 오랫동안 마시면서 영혼의 갈증을 달래야 한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낙서가 돌을 찌른다.
하나의 물방울은 완전히 미묘한 것. 그러나 그 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
그리고 물에는 부드러운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움이 쉬지 않고 꾸준히 한 곳에 집중을 반복하면 돌처럼 딱딱한 것도 마침내 뚫려버린다는 교훈이다.
우리가 날마다 실시하는 정진도 바로 이런 의미로 쉬지 않고 반복을 하는 것이다.
그 날 하루를 마무리 잠자기 전에 단 5분이라도 좋기 때문에 허리를 뻗어 곧바로 앉아 오늘의 하루를 어떻게 살아 왔는지 한 번 반성해보세요. 인간답게 살았는지 여부를 되돌아보자. 그리고 제가 지금 어떻게 되는지 보아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에 어떤 믿음이 생기면, 그것을 가슴 깊숙히 숨겨 두어 하나의 종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 종이 당신의 가슴 속의 토양에서 새싹을 내고 마침내 큰 나무로 자라기를 기도하십시오. 조용히 기도하십시오.
선은 설명이나 해설에 의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살아 있는 진리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하는 수행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문에 들어간 것은 집의 진정한 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얻은 지식과 정보는 언젠가 흩어져 날아 버리는 먼지와 같은 것, 기분이 없는 지혜야말로 그 사람의 체중을 이루고 그의 빛을 발하도록 한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시끄럽고 거친 세계를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몰입하는 행동이 더 적합합니다.
단순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의 흐름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조심하는 것은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추억’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따르지 않고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회는 우리 인간의 내면생활 중에서도 가장 승화된 정신적인 현상이다.
자신의 현재와 지나간 흔적을 되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한번 더 허물을 만들지 않는다고 맹세하는 것은 막힌 인간의 통로를 열어주는 재생의 문이다.
아무리 맹세하는 죄인이라도, 그가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그것에는 차마석을 던질 수 없다.
지금 새롭게 붙이려는 젊은 싹을 보고 누가 감히 짓밟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간회의 속성은 아이의 순수함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허물을 표백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녹색 발아와 같은 순수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은 다시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밝히기 때문이라고. 이것을 본증묘수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닦지 않으면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깨닫기 위해 닦고 깨달음을 밝히기 위해 정진을 한다는 입장은 그 틀이 매우 다릅니다.
어떤 토대 위에서 닦는지는 각각의 수용 능력에 의존했습니다.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산이라고도 불린다.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줍니다.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주위에 불안한 일이 생겨 마음의 갈증을 잡을 수 없고, 애절하게 할 수 없을 때, 애절하게 절망하는 그 기도가 우리를 돕고 마음의 안정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어떤 희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 결과를 희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순한 거래이며 계약이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절실한 마음으로 꾸준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기도 그 자체로 인생의 감사와 기쁨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열릴 때가 옵니다.
마음이 열리면 모든 것이 마음을 먹은 것처럼 보입니다.
*출처:<澄んだ香り>(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