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진산 사건의 여파는 컸다.
왕정조는 부모님의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태운 천주교도 윤지천과 그의 외숙부 권상영을 공개 참형하고 그 목을 5일간 효행하자는 형조의 의견을 가납하며 게다가 천주학 일당을 발본 색원으로 했다.
전조는 도중에 그들이 신주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땅에 묻혔다는 정정 보고를 받았지만 그래도 이름은 담을 수 없었다.
당시 정조가 토한 분노의 일성을 먼저 소개한 바 있다.
“그들이 신주를 불에 태웠는지 물었는지 불문하고, 사당 안에 있던 신슈에 의도적으로 손을 넣은 것만으로도 잘못되고 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라면 어떤 일인들을 드릴 수 없을까. 사형에 처하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시원한 처분이라고 한다.
정조의 이름이 전라감영에 도착한 직후 윤지천과 권상영은 형장으로 데려갔다.
친척에 의해 고발된 두 사람은 30대 고장을 맞아 하옥 상태였지만 결국 좋은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풍남문 밖의 형장에 가면서도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리며 설교를 했다.
그리고 만나니의 검이 휘두르는 순간, 예수와 마리아를 외치며 마지막을 맞이했다.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로 먼저 살해된 윤지천은 32세, 권상영은 40세였다.
두 명의 점포에 대해서는 완산동의 머리에 매장됐다.
소문만 있는 것만으로 오랫동안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 마지막 2021년 3월 후난 출신 복지 유한고무집이 있던 전북 초남 일대를 정비하고 있던 가운데, 거의 완전한 3구의 낡은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가톨릭교의 전주교구는 유골에 대한 해부학적·고고학적 정밀감식을 실시하고, 같은 해 9월 1일, 윤지천 바울, 권상영 야고보, 윤지홍 프란시스코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윤지홍 윤지천의 동생으로 1801년 신유박해 순교했다)
가톨릭 교도의 전주 교구 측은방부 유해 발굴 감식단에도 참여를 의뢰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국군 유해를 발굴하고 DNA 분석하여 유족을 찾는 역할을 하는 부대로서, 이것은 그만큼 발견된 유골 감식에 만전을 기했다는 방증일이었다.
그리고 유골 DNA 분석 결과, 모집단으로 선정했다 해남윤씨의 친족 5명, 안동권씨 친족 5명 DNA와 거의 일치하는 대조 결과를 나타냈다.
이제 유골은 윤지천, 권상영, 윤지헌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더 확실히 했다.
유골과 함께 출토한 3점의 사기동이었다.
이 3점의 백자동은 피장자의 신원에 대해 쓴, 이른바 덮밥 숫돌이었다.
이들은 모두 직경 15cm 정도 윤지천의 분묘에서 발견된 그릇의 숫돌 바닥에는 성균관 생원 윤공지 무덤, 속명 지천, 성명(성명, 침례)의 보석(보상, 바올로)의 문자가 적혀있다.
있어 권상연 야고보 분묘에서는 침례 대신 글자가 쓰여져 있습니다.
예, 윤지헌의 분묘에서는 축제자만이 쓰여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매장된 날짜가 안에 빙글빙글 쓰여 있었다.
그들이 매장된 날은 임자년(1792년) 10월 12일이었다.
이렇게 피나가코의 신원은 확인되었지만, 그와 함께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피장자를 매장한 사람과 백자동 숫돌을 묻은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기록이 없는데도 피장자를 묻은 사람은 유한고무와 비교적 쉽게 밝혀졌다.
유한 고무 한때 조선 가톨릭 교도 자체의 모임으로 사제로 임명되어 호남 지역에 파견된 사람으로 그의 고향이 바로 전북 원주군 이서면이었다.
그가 전주 원상동영혜리 목에 무심코 매장된 윤지천과 권상영의 시신을 비밀로 자신의 고향인 선산으로 옮겨 묻었다 사실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릇의 돌을 묻은 사람도 유한 고무와 그의 가족이었다.
(유항검은 1801년에 신유박해 순교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정약용이 소환됐다.
어머니 대학 교수가이 캐릭터의 주인공이 정약영이라는 주장을<カトリック平和新聞>에 기고한 것이었다.
그는 덮밥의 글자를 다산문집 등의 글자와 비교한 결과를 증거로 제시했지만, (아마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 외정정영과 윤지천의 관계 다산의 어머니는 윤지천의 이모입니다.
)와 윤지천의 순교에 대해 약용 부채감 등을 덮밥 제작의 이유로 들었다.
이어 그렇게 할 가능성이 주요 언론에 보도되어 대중에게도 설왕님 왔다.
그러나 볼의 돌 문자가 정약용이거나 그 제작에 정약용이 관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이 시절부터 정적 인 남인 공서파(공서파, 노론 벽파와 결탁한 남인 벽파의 무리)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생명이 상하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릇의 돌에 글자를 쓰거나 제작을 돕거나 하는 무모함을 저지르지 않았다 합시다.
* 특히 관요인 분원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전무이기 때문에 (과도하게 위험한 행동이다) 덮밥은 이장을 도운 천주교도이며, 도공이었던 한 사람이 지방 요로 제작하여 묻어 그렇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어쨌든 당시 처형된 가톨릭교 무덤에서 그릇의 돌이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정약영이 남인의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은 성균관 유생 시절인 1787년 성균관 부근 반마을(울촌)에서 서학 강의를 하고 나서였다.
이후 다산은 17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이 되었지만 천주교도로 불리며 충청도 해미로 귀양했다.
그러나 성균관 시대부터 다산을 총애한 정조에 의해 10일 만에 해방된 바 있다.
이후 저주 사제가 잡혔을 때도 관계의 혐의를 받았지만 정조가 충청도 김정정에 좌천성 발령을 내리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정조는 그렇게 정약용의 견고한 바람막이가 역할을 해 주었지만, 1800년 정조가 급서하자 그 다음해 2월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끌려왔다.
정약영은 이때도 자신이 가톨릭교도가 아님을 주장했다.
그는 가톨릭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서학과의 무관계를 강변해 왔는데, 대표적으로는 1797년에는 정조에 ‘자명소’를 실어 배교를 확실히 선언하고, 특히 1801년 의정부 부문 때는 주변의 신자 들은 것은 물론, 내 가족까지도 고생했다.
(☞ ‘정약정, 정약정, 정약용 3형제 가톨릭교’) 이런 그가 인척인 윤지천에게 부채감을 가졌다는 것은 어부성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배교를 가장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자찬묘지명(광중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유형으로 해방된 5년 후인 1822년 회갑년을 맞아<自賛墓地名>를 세우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회상하지만, 그는 거기서 「정미영(1787년) 이래 4~5년간, 매우 열심히 카톨릭에 마음을 기울였지만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나라에서 엄격히 금지하면 마침내 카톨릭으로 마음을 완전히 끊었다.
(수절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런 그는 그를 임신년(1792년) 10월에 윤지천과 권상연의 그릇 숫돌을 제작했다는 것도 어부성설이 아니다.
특히 1801년 황사연 백서 사건은 정약영이 가톨릭교에 논달헬기를 갖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조카였던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도망친다.
그 내용은 청의 황제에게 물어 조선도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조선을 청나라성에 편입시켜 국가 자체를 없애거나 서양 선수백척과 군대 5만~6 만명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믿음의 자유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하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고, 홍사영은 그해 9월에 잡혀 압송되어 이어 10월에는 경상도 장기현과 전라도의 새로운 지도로 유형이 됐다 정약영과 정약정이 다시 서울로 불리며 고문을 받았다.
노론 월 파인 사헌부 홍강안과 사간원 신구조가 이 사건 뒤에 정약용 형제가 있다고 주장 핵기 때문에 그들은 이 기회에 정약용을 매우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는 다시 태어나는 모독 중에서도 무고하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됐다.
지금 남양주 조안명 마재에 있는 정약영의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 대홍수 때 떠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1986년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다행히 동아일보 등에 옛 여유당 사진이 남아 있었지만, 이때 복원 상량문의 현판을 퇴계리황의 14대수이며 한학자인 경민 이가원 선생님 가 세웠다.
(문자는 명필운암 조용민 선생님이 썼다)
“다산이 천주를 믿은 것은 왜 천주의 믿음을 다치게 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정조는 학문을 장려하고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중흥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중국, 특히 서양의 선진학문을 배격하고, 성리학에 관한 책이 아니면 일체 반입할 수 없게 한 사람으로, 혹시 중국책을 몰래 반입해 온 사람에게는 그 상관까지 연좌시켜 엄격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중국 학자와의 필담도 법으로 금지하며 홍문관의 서양 관련 서적도 모두 태우지 않는다.
이러한 정원의 정약용에 있어서, 서학은 실로 일간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무덤에서 십자가상(고난의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이 발견된 것은 확실히 터무니 없다.
먼저 사진과 함께 잠시 언급했기 때문에, 정주교 서울대교구는 2017년 8월 웬청동 십자가상을 공개해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릉라리 마재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발굴되어 4대 후손이 기증했다”고 발표 그리고 세계를 놀라게했다.
그리고 나서 약용은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심지어 핵심지도층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들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약용 자손의 증언으로 명백해졌다.
정약용가 7대 손자차산의 묘소는 처음으로 장례식을 한 후, 지금까지 이장이나 화려한 일이 없고, 내용물을 확인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나올 수 있을까」라는 증언이 다산연구소 박석금 선생님이 채록한 것이었다.
이후 문제의 십자가는 고통의 끝에 그해 바티칸 미술관에서 전시된 “땅에서도 실현합시다!
한국천주교회 230년 그리고 서울’이라는 특별기획전 전시품목에서 제외되었다.
대상은 가톨릭교를 곧바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자 정약영을 가톨릭교도에 민감하게 하려고 하는 노력은 떠나지 않았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1801년 황사영백서 사건 때 정약정과 정약정은 유형지에서 다시 피체가 되어 올라 국문을 받았고, 이때 정적은 그들의 형제를 죽이고 무진장을 썼다.
하지만 유감스럽지만 결국 실패해 재유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톨릭 신자라는 증거를 마지막으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이좋은(나카시키 노한부동학)은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이들 약국방·약용형제는 국가중흥의 일환으로 서학을 공부하고 받아들인 것이었다.
* 이것으로 긴 남양주 겨울여행을 끝내려고 한다.
대신 계절도 이미 3월, 이제 겨울도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