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_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대한 생각이었다

  • by

로마 지형

(테베레 강)

로마 일곱 언덕모두 테베레 강 동해안에 모여있다.

테베레 강 로마지나서 30km 정도 흘러, 오스티아지나다 지중해(티레니아해)에 흘러 들어간다.

아페니노 산맥에서 300킬로미터이상의 길을 흘러 온 이 강은 로마 근처에 도달할 무렵에는 수량이 크게 늘어난다.

수량이 풍부한 테베레 강은 로마 근처에 도달하면 크게 서쪽으로 우회한 후 동쪽으로 우회하고 다시 서쪽으로 우회하면서 로마에서 떠난다.


테벨 강 위치

(일곱 언덕)

7개의 언덕은 강 근처에 있지만, 홍수 피해를 피하는 장소에 있었다.

강이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지점의 모서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중심부의 7개의 언덕/소스: Google 지도

테베레 강 옆에 있는 7개의 언덕/소스: “Schematic map of Rome showing the seven hills” by Renata3, used under CC BY-SA 4.0/ edited from original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큐리날리스(큐리날레), 비미나리스(비미날레), 에스키리누스 (에스키리노), 카피트리누스 (카피트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이리우스(체리오), 아벤티나스 (아벤티노)에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여전히 습지였습니다.

7개의 언덕은 모두 낮고, 최고의 카피트리노 언덕조차도 고도 50m밖에 없다.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지은 언덕은 모두 고도 300m 에서 500m 정도였다.

카피토리누스 언덕: 어느 언덕보다 테베레강에 가까워 삼면이 깎인 절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방어에 최적한다.

그러나 위의 평지가 너무 좁다.

. 그러므로 신들의 주거되었다.


카피토리누스의 언덕/소스: “Model of the Capitoline Hill in ancient times, at the Museo della Civiltà Romana” by Jean-Pierre Dalbéra used under CC BY 2.0

파라티누스 언덕: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언덕 위에 면적이 10헥타르나가 되어 테베레강에도 가깝다.

로물루스가 선택한 언덕.


파라티누스 언덕/소스: “Palaces on the Palatine” by Cassius Ahenobarbus used under CC BY-SA 3.0

아벤티누스 언덕: 테베레강 근처 사람이 거주하는 면적이 충분한다.

일곱 언덕에서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센터에서 벗어나 있다.

렘스가 선택한 언덕.

건국의 왕 로물루스

(로마 건국)

렘스가 죽고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먼저 파라티누스 언덕 위에 도시건설 목적으로 성벽을 쌓았다.

신들에게 살아있는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행해졌다.

기원전 753년 4월 21일).로마는 로물루스(18세)와 그를 따라 3,000명의 라틴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 날은 어디 로마 건국 기념일그 후, 2000년 이상의 수년에 걸쳐 매년 축하되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로물루스와 렘스가 새겨진 메달

(정치 체제)

왕, 원로원, 민회의 3개 기관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이하에 결정하였다.

로마의 왕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커뮤니티의 의지를 구현하고, 커뮤니티를 선도하는 존재이다.

죽을 때까지 왕위에 앉아 있지만 왕위를 세습하지 않는다.

로마의 왕은 군주가 아니라 오히려 종신 대통령에 가까웠다.

원로원: 로물루스는 100명의 장로그들을 모아 그들을 멤버로 하는 전 노원을 창설했다.

각 집의 어른을 모으면 자연스럽게 100명이 된 것 같다.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만 하기 때문에 민회 선거를 거칠 필요는 없다.

. 사적기관은 역할도 책임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기관에 속해 있는 것이다.

원로원 의원 (건국의) 아버지의미 “파텔”라고 불렸다.

여기서 귀족을 의미하는 ‘패트리키’라는 단어가 태어났다.

민회: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포함한 정부관리 선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민회는 정책을 수립 할 권리가 없으며 왕은 원로원의 조언을 받았다.

입안된 정책의 승인 결정했을 뿐이다(예: 전쟁, 외교).

(사비니족 여자 강탈)

로물루스 건국 당시 로마 시민의 대부분은 싱글 남자(각자의 부족으로부터 밀린 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이었다고 추정된다.

정치 체제를 수립한 후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폭력까지 동원 사비니족에서 여성을 빼앗다했다.

그 결과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4회전했다.

남편과 가족이 서로 싸우는 것을 멈추고 볼 수 없었던 사비니 여자가 끼어들고 나서 전쟁이 끝나고 두 부족 사이에 평화이것이 이루어졌다.


사비니 여자의 납치 (1634-1635)_화가: Nicolas Poussin(푸센)

사비니 여자 강간_화가: Peter Paul Rubens (루벤스)

사비니 여성의 약탈_ 조각가: Giambologna/ 출처: “Abduction of a Sabine Woman by Giambologna, Loggia dei Lanzi, Florence” photo by Thermos used under CC BY-SA 2.5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인. 로물루스는 제우스 신전에 바치는 갑옷을 가지고 있습니다.

_화가: Jean-Auguste-Dominique Ingres

전쟁에 개입한 사비니족 여성(1799)_화가 : Jacques-Louis David

->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고 신방의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 부산이나 루벤스 같은 후세 화가들에게 좋은 소재를 제공한 사건이다.

키닐라스 언덕: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두 부족이 하나로 결합 형태의 평화를 제안했다.

사비니족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족 전체가 키닐라스 언덕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사비니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했다.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주어졌다.

사유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와 함께 민회에서의 투표권도 갖게 된 것이다.

사지니족 장로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됐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인구 및 병력 증강을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영토 확장)

사비니족의 왕이 전사했고, 전투는 거의 로물루스가 지휘했다.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켄투리아) 제도를 고안했다.

로마 군단의 최소 단위이며 핵이었다.


「백인 대장 모습을 한 라인 액터」 by Medium69 used under CC BY-SA 3.0

(죽음)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39년째맞이하다 기원전 715년, 다른 속의 모든 하늘이 흐리면서 세찬의 샤워가 쏟아졌다.

장대와 같은 비의 줄기가 시야를 덮고 귀 매가 떨어지는 우레음이 주위를 압도했다.

이후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빈 왕좌였다.

제2대 왕누마

(미사토 초대)

늪은 사비니족이었다.

농업을 건설하는 한편 지식 탐구에도 힘을 쏟는 그 높은 덕과 깊은 교양은 로마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로물루스가 죽는 라틴과 사비니의 갈등혼란 스러웠던 로마의 전 노원은 만장일치로 늪을 왕에게 추종했다.

민회도 찬성했다.

늪은 이미 40세그래서 처음은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요청에 결국 왕이 된다.


출처: “Numapisocng6371obverse.jpg” by Avilich used under CC BY-SA 2.5

(야누스)

늪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세운 로마 이후 질서를 수립하고 습관을 개선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출입문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인 야누스에 바치는 성전을 세웠다.

야누스는 반대 방향을 향해 두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늪은 완성된 야누스 신전의 앞문과 뒷면을 백성에게 보여주고, 이 문은 전시에는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는다라고 말했다.

늪이 로마를 다스렸다.

43년문은 한 번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바티칸 미술관에 전시된 야누스 동상/출처: “Double herm. Marble, Roman copy after a Greek original.” by Marie-Lan Nguyen used under CC BY 3.0

(농업업)

늪은 이 시기의 로마에는 방어를 위한 전투 이외에는 어떠한 싸움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농축업의 진흥에 힘을 쏟았다.

(부족 간 대립 약화)

늪은 로마 시민을 각종 직능별로 분류그리고 모든 시민 자신의 수호신을 갖는 단체에 소속하도록 했다(목공조합, 철공조합, 염색공조합, 도공조합 등).라틴과 사비니 부족 간의 갈등을 막는 목적이것은 강했다.

그건 그렇고, 건국 당시 로마는 다민족국이었다.

(캘린더 개혁)

로물루스 시대의 로마에서는 1년의 일수가 정해지지 않았다.

늪은 달이 차갑고 기울어지는 것에 따라 1년을 12개월로 결정하고, 1년의 일수를 355일라고 결정했다.

남은 일수는 20년마다 결산한다.

늪이 정한 이 캘린더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1년을 365일로 개정할 때까지 650년 로마인의 일상을 바치게 된다.

또, 1년간의 각 달의 배치도 3월이 첫 달이었던 것을 세 번째 달에 바꾸어, 11월과 12월이었던 달을 앞으로 가져와서 각각 1월과 2월에 결정했다.

하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각 달의 명칭까지 바꾸지 않았다.

그러니까 9월 이후의 명칭이 본래의 의미와 어긋난다 했다.


로마 캘린더/소스: 로마인 이야기 1

(휴일과 축제일)

휴일: 매월 9일째와 15일째밭의 날부터 해방되어 매회 수확물을 가지고 모이는 장소가 서 있었다.

축제일: 년에 45일을 세면서, 하나님께 축제를 보냈다.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제사장을 보내는 이 축제의 날에 모든 공무를 쉬었다.

(종교 개혁)

순위로마인들은 이미 많은 신을 섬겼다.

그리스 신들과 야누스 신을 비롯한 라틴족 신들, 그리고 사후에 신격화되어 신이 된 선왕 로물루스 등이 있었다.

늪은 그런 신들을 정리하고 계급을 부여했다.

하지만 어떤 신 하나를 정하고 로마의 신을 규정하지 않았다.

또한 신들을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 신들: 신들의 왕, 유피텔(그리스에서는 제우스/영어론 주피터), 그의 아내 유노(헤라/쥬노),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비너스), 사냥의 여신 디아나(아르테미스/다이아나), 학문과 예술의 신 아폴로, 지혜의 여신 아테네, 전쟁의 신 마르스 등.

제우스와 헤라

다신교(그리스, 로마)와 일신교(유대교, 기독교)의 차이: 다신교에서는 인간의 행위와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를 신에게 요구하지 않는 반면, 일신교에서는 그것이 전매 특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신교 신들은 인간과 같은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신교와 일신교의 차이는 다른 사람의 신을 인정할지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사람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즉시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다.

수호신: 대신 로마인은 하나님께 수호를 요구했다.

로마인들은 많은 신들이 구석구석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른 민족의 신들도 배척하는 커녕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추상적 사고를 장기화하는 그리스인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로마인 동향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예: 로마에서는 부부 전투가 발생한 경우 부부 싸움의 수호신 빌리플라카 여신를 모시는 사당에 간다.

거기에는 여신상이 있는 것만으로, 신관도 없고 아무도 없다(로마는 다신교이므로, 모든 성소에 신관을 배치할 여유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로마인들은 감시자가 없어도 규칙을 지켰다.

빌리츠라카 여신 앞에서 지켜야 할 규칙은 한 번에 한 사람씩 차례로 여신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 하나는 자고 있습니다.

없고, 그 과정에서 상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양측이 반복하는 사이에 흥분했던 목천도 조금씩 가라앉아 결국은 둘이서 사이좋게 사당을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수호를 요구하는 이 생각은 인간성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욕구로 보인다.

퓨즈 조직: 최고 신관(폰티펙스 막심스)– 그 밑에 5명에서 10명의 내각이 있다.

무녀(베스타)– 성화를 지킨다.

30년 동아무녀에 근속하지만 지금까지 을여성을 지켜야 했다.

사제– 10명 정도가 되어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나 모임을 잘라 먹는 방법을 보고 공사의 길가를 차지했다.

다만, 현실적인 로마인은 그것을 곧 즉시 따르지 않고 내 맛에 맛있게 해석했을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사제/출처: “Roman relief depicting a scene of sacrifice, with libations at a flaming altar and the victimarius carrying the sacrificial axe” by Wolfgang Sauber used under CC BY-SA 3.0

로마 장관과 사제 하나님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 사제가 되기 위해 특별한 능력도 필요없고, 그 능력을 기르는 훈련도 필요하지 않다.

무녀를 제외하고 평범한 사람과 같은 삶를 운영했다.

모든 사제는 민회에서 선거로 결정했다.

집정관을 비롯한 정부관리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국가공무원이다.

고정된 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을 보전하기 위해 종교에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로마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불화와 유착은 일어날 수 없었다.

.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대한 생각이었다” <古代ローマサ>디오니시오스

종교보다 법률: 인간 윤리도덕과 행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형태없는 경우, 인간은 짐승과 같은 상태에 빠져 버린다.

따라서 개인이든 국가인 커뮤니티든지 자기 정화 시스템를 가져야 한다.

종교는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유대인은 종교에, 그리스인은 철학에, 로마인은 법에 맡겼다.

(이방인이 왕?)

원로원의 요청과 민회의 정식 승인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늪은 지지세력도 없고 혈연관계도 없는 한 이방인이었다.

로물루스는 민중이 이해하기 쉬운 군사적 성공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늪에는 이것조차 없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 로물루스의 호위대였다.

300명의 군인을 해임했다.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이 아니라 신관이 입 화이트 토가걸려 혼자 자주 숲 속에 쏟아졌다.

사람들은 늪은 님프를 통해 신들로부터 계시받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늪은 숲에서 나올 때마다 새로운 개혁안을 민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누마가 로마 법안을 수락하게 하는 님프 지역/출처: “The nymph Egeria dictating the laws of Rome to Numa Pompilius”, by Ulpiano Checa used under CC BY-SA 3.0

늪은 43년간 로마를 다스린 뒤 세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