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동 ​​시절 김수연

  • by

마을사람처럼 보이지만 김수연은 1921년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낮은 오피스 빌딩의 점유가 되었지만, 집의 흔적을 세우는 장소가 전혀 없는지 종로2가탑골공원 맞은편에 길을 따라 선가터 표지판이 있다.

그러니까 터무니 없는 곳에 세워졌다고 탓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기실 관철동 골목 안쪽에는 서는 곳이 틀림없고, 또 있어 보면 눈에 띄지 않는다.

(☞
김수영의 수영장)

그 다음 해인 1922년 김수연 일가는 종로 6가로 이사했다.

김수연은 여기서 효제초등학교에 다녔고 선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희 전문을 다닐 때까지 살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며 북한군에 징집돼 그 후 국군의 포로가 됐다.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됐다.

전쟁 후,
아내와 함께 성북구 일대의 세트룸을 전전하고 마포구 9수동으로 옮겨 집을 마련했다.

1956년 6월이었다.

마포구 9수동 41-4번지. 이것이 그의 집 주소였습니다.

ㄱ자형의 괜찮은 구옥이었지만 한강이 내려다보였다는 그 주소지에는 현재 영풍 아파트가 들어가 있지만 101동쯤에 그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조차 힘들었지만, 당시 그의 집은 배추밭과 시금치밭에 둘러싸여 나머지는 잡초의 산이었다(부인 김현경의 회고)도 기르고 또 글도 썼다.

아래의 시는 그 무렵의 여름날에 쓴 것이다.

여름 아침 (부분)

여름 아침 시골은 가족처럼 보입니다.

햇빛을 모자처럼 앉아 있던 사람들은 밭을 선택

우리 집에도 엄마는 무를 뿌렸다.

부드럽게 구부러진 산 등반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밤의 쓴 냄새와 청각과 미각과 통각조차 잊으려고합니다.

…..

물을 띄운 아내의 얼굴은

어떤 틈에 그렇게 검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차례로 시골 동리인의 얼굴을 닮아 간다.

더워지는 햇살이 산 위를 걸어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

나는 나의 까맣게 불타는 정신을 생각한다.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다

밭 사이를 무겁게 걷다

그는 그 무렵, 배추농사와 가금류 사업(11마리의 병아리로 시작된 것이 닭 750마리가 되었다고 하기 때문에, 사업이라고 할만한 가치)에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처럼, “천천한 원고벌보다 한층 더 마음이 편하고 갓 태어난 직업을 갖고 있는 듯한 자치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먼저 미군 통역, 선림산호 영어교사, 평화신문문화부 기자 등의 직업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시업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이때 가장 많은 시를 썼을 것이다.

1968년 6월 15일 귀 대로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곳도 이곳 9수동과 신수동 사이에 길이 있었다.

그러면 마포구 9수동이나 신수동 아파트단지 부근의 공원에 그의 시비 하나쯤은 지어져야 했지만, 여기서 김수연의 흔적과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김수연의 흔적은 도봉구 도봉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노모와 누나가 살던 곳이다.

김수연의 본가 가족들은 전쟁 이후 선영이 있던 도봉구 도봉동산 107-2번지로 옮겨와 살았다.

그때 김수연은 양계사업이 생계는 영업할 수 있다고 본 결과 노모와 가족을 위해 도봉동 본가에도 작은 양계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양계장의 관리 겸 한 달의 절반 이상은 도봉동에 와서 살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구수동보다 여기 환경에 훨씬 애착을 가지고 있던 것처럼, 문장이나 번역대로 일이 생기면 언제나 도봉동에 와서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물론 창작도 했습니다.

시기 전에 쓴 유치할 때 “풀” 전쟁 경험을 담았다”“의용군”이라는 미완의 소설 도봉동에서 집필됐다.





김수연이 살던 무수골마을 표석과 도봉천

지금 도봉구 방학동에 김수연 문학관이 건립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방학동과 김수연과는 그다지 큰 인연은 없지만 마포구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동안 재빨리 문화콘텐츠를 인터셉트했지만 도봉산 초입에 지어진 김수연 의 시비가 당위성에서 제공된 것으로 생각된다.

도봉구 공식 사이트인 ‘디지털 도봉문화대전’은 김수연 시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김수연(김수연, 1921~1968) 사망일주기를 앞두고 당대의 대표적 문학예술잡지<現代文学>를 간행하고 있던 현대문학사가 선두에 서서 김수연 시비건설위원회를 시작해 선배 후배 문인들과 지인들의 뜻을 모아 19년 6월 15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산 107-2번지 김수연 시인의 무덤 앞에 만들어졌다.

시비는 원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산 107-2번지 김수연 시인의 무덤 앞에 있었다.

김연태나 황동규 시에 등장하는 김수연 시인의 무덤에 관한 진술은 모두 이 지점에 대한 것이다.

1990년대 초 김수연의 어머니가 죽자 나머지 가족이 상담하고 성연의 무덤을 파고 산골을 터뜨렸다.

이에 따라 김수연의 무덤도 개장해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한 뒤 무덤 앞에 있던 시비를 1991년 4월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산 구역 내도 봉서원 앞 현재 자리로 옮기면서 그 하유골상자를 만들어 채웠다.

따라서 현재 김수연 시비가 바로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연의 시비는 도봉산 아래에 마련됐다.




김수영


도봉소원 아래 김수연 시비/’풀’의 일부와 함께 청동으로 시인의 얼굴을 새겼다.

김수연(金洙暎) 시비의 시는 시안의 등근이 쓰여져 시비의 몸통에는 시인의 육필로 시 ‘풀’의 두번째 연을 새겼다.

먼저 말했지만 풀」을 「억압되는 민초」로, 바람은 “그 민중을 억압하고 굴복하고 싶다 “부당한 권력”으로 간주되는 이데올로 기적 해석은 이제 지지되어야 한다.

물은 흐르는데 소용돌이 치는 그 시대의 물을 그리운지 여부, 아직 그때 머무른다.

지금은 지쳐 있습니다.

원래부터 “풀” 잔디는 그냥 잔디였습니다.

바람보다 빨리 누워서 바람보다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전문)

잔디가 누워
비가 내리는 동풍으로 뛰어들
잔디는 누워 있습니다.


마침내 울었다.


날이 흐리게 울고
다시 누워

잔디가 누워
바람보다 빨리 누워
바람보다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날이 흐리고 잔디가 누워
발목까지
발밑까지 누워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 앞에 일어나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음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누워



바로 옆의 계곡에는 ‘높은 산을 숭배한다’는 ‘다카야마 앙지’의 문장이 적혀 있다.

도봉서원의 흔적임에도 불구하고 글자의 일부와 글쓰기 이름인 김수진은 물에 잠겼다.



「까마귀 놀이 곳에 백로에 가서는 안된다」라고, 그 물가에서 부근의 절의 까마귀의 무리를 피해, 백로 한 마리가 뛰어들었다.


그 백로가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방학동 김수연 문학관 안에 있는 김수연의 청동 흉상이다.



방학동 김수연 문학관



김수영 문학관 육필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