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는 지리적으로 북미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전쟁과는 별개로 보입니다.
실제로 영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영국이 참전한 수많은 전쟁에 자동으로 참전했습니다.
미영전쟁을 시작으로 보아전쟁, 제1,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아프간전 등
다양한 국제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특히 미영전쟁 당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점령해 백악관을 태운 것도 식민지 캐나다군의 활약
캐나다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캐나다 경제, 사회구조가 전체적으로 산업화될 때까지
냉혹한 쌍이 없는 혹한의 캐나다 대자연과 싸워 먹고 살아온 농부, 사냥꾼, 벌채자와 같은
강인하고 인내를 요구하는 1차 산업 종사자가 많았기 때문에 병사들의 기량이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높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전투에서 활약해 독일군에 악명 높다.
전쟁 당시 적을 가장 많이 사살한 저격수도 캐나다군이 배출한다
(378명 사살한 원주민계 캐나다군 프란시스 페가마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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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활약했지만, 캐나다군은 110만명이 참전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캐나다군은 상륙 15분 만에 독일군 진지를 돌파하고 주노 비치를 점령하고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비치의 후방을 차단해, 독일군을 포위 섬멸해
1시간 앞에 상륙한 미군보다 빨리 해변을 장악한다
캐나다군이 상륙한 준호비치는 미군이 상륙한 오하마 비치 다음에 죽은 자수가 나온 곳에서
캐나다군의 15분의 기적은 행운이 아니고, 캐나다군의 피지컬로 했다는 것.
대전 기간 동안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임원이 주어졌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6.25 전쟁에서도 캐나다군은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파병했다.
당시 캐나다 군의 절반을 한국으로 보냈다.
6.25 전쟁시 캐나다군이 가장 활약한 가평전투는
캐나다군보다 13배나 많은 중공군 6000명을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의 지원 하나로 바텐 전투로
자신들의 참모에 포격 요청을 했을 정도로 긴박했지만, 결국 캐나다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았다.
이때 캐나다군은 1대대 레벨 450명으로 6000명이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47명의 죽은 자와 99명의 부상자
중공군은 적어도 1000명에서 최대 4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
이 가평전투에 의해 중공군은 이후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받지 않고 38선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됐다.
한국전쟁에서 큰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는 병사들의 솜씨만 높은 것이 아니라 방위산업도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하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가 생산한 군수품은
소총 170만정
80만대의 군사차량
5만대 탱크
4만대의 대공포
16000대의 군용기
1만톤급 선박 348대를 생산하여 연합국에 공급
이처럼 캐나다는 전쟁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이루며 경제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캐나다는 세계 3위 무역국이 되었다.
또한 세계 4위 규모의 공군력을 갖게 되어 전쟁 전 단 몇 군데의 군함밖에 없었던 해군은
400대 이상의 군함을 보유한 해군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6·25 전쟁 중 한반도 상공을 수호하고 있던 항공기의 대부분은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캐나다의 방위 산업은 제 2 차 대전 중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육지, 바다, 하늘의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과 전문 기술 인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