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초기 북한은 왜 3일간 서울에 머물렀는가? – 춘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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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시작했다.


북한은 다음날 26일 서울 방위의 핵심이었던 의정부를 돌파하고 무려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사실상 수도방위전 과정에서 국군 피해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북한은 하루 최고 속도 25km를 진격해 3일 만에 조치원, 6일 만에 대전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사실 김일성의 초기계획은 미국이 대응할 수 없도록 한 달 동안 한국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갑자기 서울에서 3일간 진격을 멈춰 버린다.


북한이 3일간 진격을 멈춘 덕분에 뿔이 흩어져 있던 국군은 재정비한 뒤

지연 전에 조금씩 시간을 보낸 덕분에 한국의 조기 파멸을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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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사령부 보고서에는 김일성이 낙동강 방위선을 뚫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기까지 시간을 늦추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김일성도 후일 “서울에서 3일에 쏟아지지 않았다면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매우 유감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도하 없이 머물렀는가?


첫 추측에서는 국군이 한강 다리를 폭파했기 때문에 북한군의 무기를 쓰러뜨릴 수 없었을까?

당시 국군이 파괴한 한강교는 히로츠바시, 인도교 밖에 없었다.

충분히 도하 할 수있는 다른 다리가있었습니다.

또한 일부 폭파를 시도한 한강 다리 속에서 한강 철교는 침목과 철로만 약간 손상되어 있을 뿐 거의 멀었기 때문에

다리가 없어 북한군이 병력과 장비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두 번째 추측으로 북한에는 서울제한점령론이 있었다.

북한 정상부 일부에서는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과 한국의 지하세력이 호응해 내부분열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김일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펩티상소탄 작전 등을 통해 기대를 접는다.


무엇보다 북한군으로부터 노수한 문서 속에서 한강을 점령하자마자 도고 진격하라는 훈시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북한은 당초 서울에 머물 예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짜 원인은 무엇입니까?


소련은 미군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야 한다고 김일성에 강하게 주장했다.

따라서 북한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선제 타격 작전도’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전도에 따라 총 3단계로 계획을 나누어 1개월 이내에 한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1단계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이다.

수도 방어선을 관통하여 주력 국군을 멸망시키는 것만으로, 잔여 병력은 쉽게 섬멸하다

남해안까지 바로 점령이 가능하다고 봤다.


그런데 이 1단계에서 문제가 생겨 버린다.

북한군 2사단은 중부전선에 위치한 춘천을 하루 종일 점령하고 수원으로 내려간다

후퇴하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일제히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당시 북한군 2사단은 그 정도로 중요한 임무를 맡은 만큼 정예군으로 선발됐다.


즉, 2사단도 원래라면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된 것처럼 수원까지 직물 수직 밀고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이 모진교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옥상포에 곧바로 출동해 진격해 오는 북한군에 기습 공격을 가한 것.


이 국군 6사단 7연대도 625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전부 보리밭이었던 우두산에 미리 참호를 파면서까지 콘트라스트를 하고 있던 거임.


그렇게 이틀간 옥상포를 지킨 국군은 포위를 피하고 서양 다리로 옮겨 방어전을 재개하는데

이 서양교는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위치에만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다.


이 전투에서는 국군 포병들이 굉장히 활약하고 북한군 포로의 심문에 공포와 피해가 적당하다고 쓰여 있을 정도


국군 6사단의 초동 대응 덕분에 춘천 점령을 무려 3일 늦추었다

춘천을 하루에 점령하고 수원으로 내려간다는 첫 번째 계획부터 무산해 버린다.



이처럼 북한군 2사단이 춘천에서 고전했을 때 북한군 12사단도 홍천을 점령하고 2사단을 도우려고 합류하려고 했지만

이 12사단에도 말머리로 문제가 생겨 버린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고 있던 6사단 2연대가 이 말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거임.



교육을 받는 동안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복귀한 연대장

당시 말머리가 좁은 산길을 통해 내려오는 북한군의 T-34를 저지하고 싶다.

11명의 육탄돌격대를 결성해 병사들과 결사 항쟁을 벌인다.



당시 육탄돌격대의 임무는 좁은 산길에 매복하고 있었지만 북한군의 전차에 수류탄을 던져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6사단 2연대는 대전차포의 지원을 받아 수류탄으로 북한군 탱크 10여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런 국군의 희생 덕분에 좁은 산길에서 탱크가 퍼져버리기 때문에 12사단도 28일까지 진격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얼마나 타이트해지면 당시 춘천 전투총책임자였던 북한군의 2군 단장과 2사단장, 12사단장을 무늬 교환해 버린다.

이 춘천 전투의 성공적인 방어 덕분에 수도 방어에 실패하고 후퇴한 국군은 전멸을 막았다.

8월 낙동강 방위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을 막아,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과 함께 반격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