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꽃을 피우는 ‘4·19 혁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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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4·19 혁명의 시작점이 됐다.

4월 19일 화요일은 피의 화요일이라고 칭한다.

그날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동안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대학생들까지 일어섰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4월 19일 시위 동안 1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은 동시 다발적으로 열린 시위에 두려워했거나 계엄령을 선언한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사태의 원인도 모르고 ‘난동인 폭력 시위다’고 말해 괴로웠다.

이런 한심한 행동에 군대와 미국도 이승만에 등을 돌렸다.

3월 19일 신문에 게재된 뉴스는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캄파가 시위를 하고 있던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해 폭력을 저질렀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국민에게 큰 분노를 가져왔다.

대학생들은 21일 예정 시위를 앞당겨 19일 진행하는 것으로 바꿔 서울대문리대에서는 ​​19일 오전 11시 시위를 시작한다는 역정보를 동대문 경찰서에 흘린 뒤 실제 19일 오전 9 때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수백, 수천여 명이 부정선거를 항의해 이승만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서울시위대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시위대가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에 나오자 일반 시민까지 시위대에 합류해 방대한 규모의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분의 집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의 진압도 부득이했다.

공포탄과 최루탄, 무차별 폭력 등으로 21명 사망, 172명 부상 결과를 낳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경무대 앞에서는 경찰의 무차별 진압에 학생과 시민이 생명을 잃었다.

이날 서울에서 총 사망자 수는 104명이었다.


죽은 자가 늘어나 무차별적인 경찰의 진압에도 시민의 분노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분 사옥 등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평화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점점 무력 시위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먼저 이승만과 자유당을 옹호하고 있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붙이고 방공을 외치며 시민을 압박한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견소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어 불타지 않게 되었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 소총으로 무장해 경찰과 총격전을 하기도 했다.

4·19 혁명의 주도는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시내 소재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교문을 다가와 이 더러워서 못생긴 이승만의 야망에 일어섰다.

마산의 김주열 열사 사건으로 동년대 고등학생이 시위에 먼저 나서 참가했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 지역에서도 4·19 당일 처음으로 시위에 참가한 것은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이었다.

이후 서서히 대학생이 합류해 4·19혁명의 주도층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1월 19일 당시 고교생 시위에 서울대 물리과대학 학생들이 함께하면서 종로에 진출했다.

이어 법대, 약대, 수의대 등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해 사범대까지 합류해 시위 규모는 확대됐다.

의대생들은 의사 가운을 입고 “학 친구들,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
”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시위에 참가했다.

그 후 고려대학 학생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하고 이어 건국대학, 동국대학, 성균관대학, 연세대학, 중앙대학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여 10만 명까지 불어 서울의 도심을 가득 채웠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은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달리 중립을 지키고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고집해 무력시위에 가담하지 않고 시위대와 협상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저녁이 깊어지고 시위대는 서서히 진압되기 시작했다.

유혈진압을 주저하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워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무차별적인 총격전이 일어났다.

결국 시위대는 고려대학교 정에서 마지막 저항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데리러 이대로 똑바로 들어갔다는 둘 다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었다.

이때 놀랍게도 제15사단장 조재미 준장 당시 4·19혁명 서울지역 위수계엄사령관이었던 그는 단 2명의 부관만 대동하고 고려대 나침반에 진입했다 . 학교 강당에 들어가 태극기로 덮인 시위 희생자들 앞에서 정중하고 굉장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그 모습에 시위대는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게 됐다.

당시 4·19혁명 서울지역 위수 계엄사령관이었던 제15사단 조재미 준장은 계엄군에게 세 가지 원칙을 지키도록 각급 부대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우선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 및 폭력을 금지한다.

둘째, 민가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셋째, 민간인에게 음식 등을 받는 것을 금지한다.

이승만을 지지한 미국도 4·19 혁명으로 등을 돌린다.

지금까지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4월 19일 사태는 달랐다.

월터 패트릭 마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 해결을 희망하겠다고 요구하며 대사관으로 돌아가자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알렉산더 해터 미 국무부 장관이 주미 한국 대사에 항의각서를 보낼 때까지 했다.

이 각서는 사실상 미국이 이승만을 버렸다는 뜻이다.

미국과 서유럽 자유진영국가가 이승만에 등을 돌렸을 뿐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사표를 내고 23일에는 장면이 부대통령 사임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거절하겠다고 밝혔다.

그래도 국민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강 상태가 된 시위의 불길을 재연하게 하게 된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 교수단의 시위였다.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가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해 시위에 이르렀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해 시위 규모는 삽 시간에 1만명까지 불었다.

여담에서 이 시기대학 교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벼룩을 일렬로 세우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당시 유교문화가 진하게 남아 있던 시정이며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만큼 교수들 사이에서도 이승만의 만행은 볼 수 없는 파렴한 행동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전 시위에서는 ‘선거 다시 시작’이 주요 요구였을 경우 교수들은 ‘이승만하야’를 직접 요구했다.

이런 시위에 이상한 것은 단 한 명의 경찰도 올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갖고 있는 사회적 권위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뒤 계엄군이 출동했으나 무장한 군인들은 시위대 앞에서 때렸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에 속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에 올라 ‘대한민국 국군 만세’라고 외쳤다.

이 모습을 본 군인들은 눈물을 흘릴 때까지, 이후 계엄군은 시위대 총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환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을 지키는 마음이 사라져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됐다.

그 후 시위대가 시위를 하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잡았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지만 막막에 거부했다.

이미 방송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마지막 발음이 시작됐다.

옛 독재자의 메스꺼움은 내 모습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많은 사람들의 설득으로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한다.

이렇게 오후 2시 국회는 이승만을 즉시 해야 하며 정부통령선거 재개, 내각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다음날 오후 3시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 헌법 규정에 따라 허정 외무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내각을 수립했다.

나중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발족하게 됐다.

이승만만 물러나 자유당 정권은 붕괴했다.

이기분은 28일 장남 이강석의 자결 총격으로 한 가족이 모두 동반자살이라는 비참한 마지막을 맞았다.

그리고 이승만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 사망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국민이 원했던 민주화의 꽃은 모두 피지 않았다.

국민은 몰랐다.

이승만 뒤에 넣은 파간치와 메스꺼움이 있는 놈이 있다는 것을.

(기획 기사) 우리는 다시 꽃을 피우는 ‘4·19 혁명의 시작’

마산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4·19 혁명의 시작점이 됐다.

4월 19일 화요일은 피의 화요일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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