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부산시민공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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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부시민 공원의 역사


주말을 맞아 시민공원에 나갔다.

따뜻해진 날씨에 많은 사람들이 피크닉을 즐겼다.

3월 중순 봄은 꽃망을 폭파할 준비가 됐다.

우연히 들른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시민공원에 수십번은 온 것 같지만 역사관은 처음이었다.


하야리아 미군 부대 시대, 장교 클럽으로 사용하고 있던 건물을 역사관으로 조성했다

역사관 관람객을 제일 처음 맞이하는 공간. 이곳은 캠프 하야리아 임원을 위해 식사, 연회, 공식 행사가 열린 장소였다.

공원 역사관의 전시 테마와 의미를 담은 영상을 상영한다.


천장 중앙에 미 8군을 상징하는 팔각-십자형 마크가 새겨져 있으며, 8개의 별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둥근 홀을 지나면 본격적인 전시공간이 나온다.

이 땅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본격적으로 조명되고 있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거의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

시민공원 부지가 평지였고 조선시대부터 농지에서 집성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인이 반강제로 사지 않았는지 추측해 본다.


일본인의 소유가 된 1930년대부터 오락, 마권 판매, 군마 양성을 위해 서면 경마장을 운영했다.

여기에 경마장이 있었다니 어렸을 때 외가가 근처에 있어 친숙한 장소이지만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제 시대 신문에 나온 경마 광고

경마기사와 당시 판매된 마권

부산경마대회 우승프로피와 레터

당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다수의 일본인들이 사업 등을 이유로 한국, 특히 부산에 건너게 됐다.

한국에서 자원을 수탈하고 부를 쌓은 일본인들은 부를 즐기기 위한 나이트라이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해 여기에 각종 일본군 부대가 위치해 연합군 포로 감시원 양성을 위한 임시군속훈련소가 설치되는 등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42년 5월 조선인관, 대만인 등으로 구성된 포로 감시원은 표면상 지원형사였지만 행정관리와 순회를 동원해 강제적으로 모집한 사실상 강제징용이었다.

3,223명에 달한 이들은 여기 서면경마장 부지에 마련된 임시군속훈련소에서 2개월간 엄격한 훈련을 받아 동남아시아 각지로 파견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국인 포로 감시원 중 129명이 전범에 몰려 재판을 받고 이 중 14명은 사형, 나머지 115명은 동남아시아 현지와 일본에서 징역을 살지 않으면 되지 않았다.

사형이 된 조문상 씨의 유언
사형당한 강태현씨의 유언

포로 감시원으로 활동하는 일제 패망 이후 전범에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26, 27세에 짧은 삶을 살아간 애통한 젊은이들이 들었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원래 마음껏 살아보지 못한 그들의 마지막 유언을 보고 마음이 강해졌다.

마지막 순간,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원통으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조국 부흥을 염원했다.

일제가 패배하고 해방이 되어 잠시 후 미군정이 시작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 ‘캠프 하야리아’가 설치됐다.

그 후, 2006년에 기지가 폐쇄될 때까지 이 땅에 다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군이 사용하고 있던 식기들. 야만이 되었다.


미군의 생활 용품. 만년필과 칫솔, 물통 같은 것이 있다.


미군 군인의 텐트. 캠프가 제대로 설치되기 전인 것 같다.



하야리아 부대 근처에 세탁하는 아낙. 당시 미군의 세탁감을 받아 세탁을 해주고 돈을 받았다.

하나당 100원(당시 쌀은 한정된 값)이란 그 시대에 제법이 치열한 돈벌이가 된 것 같다.


한국 기념품 숍.당시 미군이 만든 기념품을 전시

그 시대의 거리 노점 재현

가대의 상품.지금도 똑같이 팔리는 허쉬초콜릿

그 시대, 프로봇대의 모습. 반공 반복을 강조했던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시대, 부대 근처의 잡화점을 재연해 두었다.

어릴 적 이런 비슷한 모습의 천당이 있던 기억이 나온다.


옛 술과 음료의 병. 어렸을 때 많이 본 매치의 갑을 보고 매우 기뻤다.


그 시대의 인기 만점의 밍크 담요

하야리아 부대는 50년 너무 여기에서 있었다.

외가가 여기 가까이에서 어렸을 때 차를 타면서 보고 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거기는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어디보다 낯설고 멀리 느껴졌다.

내 주위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이었습니다.

미군이 철수해 시민들은 이 땅을 시민의 회로 돌리기 위한 무상양녀운동을 펼쳐 2010년 마침내 부산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완전히 시민의 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쳐 정말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시내에 가까운 곳에 이렇게 넓은 부지가 공원에 조성되어 시민들의 멋진 휴게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우리 옆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아이러니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부산시민공원이 우리의 비극적인 근현대사를 안고 있었다는 것을 이곳 역사관을 방문해 처음 알고 의외의 발견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쓴 마음이 들렸다.

시민 공원의 나무와 꽃이 더 풍부해지고, 우리 옆에 지금처럼 오래 남아 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