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와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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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생존에 수반되는 물질적 만족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점에서 서서히 자고 있는 영혼이 깨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명을 지탱하는 힘에 반응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나타내는 영혼은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내외의 환경에 따라 최선의 선택지로 이끌려 간다.

자신이 가진 지식 수준에서 가장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영혼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다만 그 지식 수준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무수한 세계가 공존하는 이상하고 이상한 우주의 실체이다.

영혼의 질량이라고 불리는 지의 수준은 인생의 목적이 바로 영혼의 성장과 진화에 있음을 증명해 주는 기반이다.

단순히 육체적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것만으로 인생이 멈추면, 물질적 요구가 충족된 시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모두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넓고 깊은 차원에 해당하는 영혼의 성장과 진화에 생활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로운 후에도 혼란 속의 질서를 세우는 것에 다른 사람이나 자의 속에서 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개별 의식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 무의식 수준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 보완적인 존재입니다.

개인과 집단 무의식을 넘어선 지점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시각을 얻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다가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봐도 무방비다.

완전히 스스로를 비우는 것으로, 대상에 대한 일체의 견해를 지워버린 마음만이, 분리가 없는 실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된다.

개인과 집단 무의식을 넘어 분리하지 않는 실상은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는 지점에 균형과 조화를 가져오는 신성의 나타난다.

보통 생명의 근원이 육체적 형상에 속한다고 믿는 물질의 세계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모든 유일한 목표가 된다.

아직 개인의 무의식을 넘지 않은 단계이므로 삶은 동물적 본성이 가지는 법칙에 따른다.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물질의 세계는 적과 대전하는 투쟁과 대립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국가는 경계가 육체적 형태로 제한되기 때문에, 그 범위 밖에 있는 것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받아들여진다.

먹고 먹는 물질의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살기 위해서는 적과 싸워 쓰러뜨리는 방법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집단 무의식의 수준에 위치한 영혼은 육체적 형상보다 확정된 대상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직업, 사회적 위치, 성별, 가족 구성원 등 모든 문화와 사회, 관습, 전통이 부과하는 거슬러 올라가는 스스로를 한정하는 영혼은 보다 섬세하고 세련된 지성을 가진 채 대립과 갈등의 영역에 다이빙. 정치적 갈등, 이념 사상간의 대립 그 모두가 확장된 자기가 펼치는 주도권의 싸움에 차이는 아니다.

하나이며, 모든 영혼에서 오는 질서와 통합의 힘이 전해질 때까지 영혼은 모든 제약을 자유와 사랑보다 애정을 멈춘다.

마음 속에 모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차단하는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집단 무의식의 장벽은 전체와 부분을 나누는 미묘한 분리감을 유발한다.

그 모든 것을 밝히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그 모두를 넘고 있다는 당연하면서도 단순한 원리를 모르는 것처럼 개인과 집단 무의식의 장벽은 두꺼워진다.

개인과 집단 무의식을 넘기 전까지 영혼은 실상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최초로 깨달은 순간이 바로 전체 우주를 탄생시킨 최초의 원인이라는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

육체의 탄생과 영혼의 주의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사건이며, 이때야말로 우리는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점에 이른다.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고, 어디를 둘러봐도 ‘나’가 아닌 일이 없는 전부인 상태에서 보면, 개인과 집단 무의식의 장벽을 넘는 힘이 비개인적인 의식의 장소, 즉 위에서 내려 온 것이 분명해진다.

하나이며, 모두인 영혼으로부터 육체적 형상에 이르기까지 내적변용을 일으킨 힘은 바로 분리가 없는 실상으로부터 오는 신성의 힘이다.

땅에 내려왔다 영혼 주어진 임무는 모두 존재의 구원과 해방이다.

이것은 자기 지식 알다 이전과 그 이후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창조하는 힘은 옛부터 남성 성의 영역이다.

활성화되지 않는 잠재성을 가진 상태인 것이 바로 여성성의 본질이다.

영혼 속의 균형과 질서를 도모하는 힘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로부터 온다.

이 조화를 올바르게 형성하는 능력은 그 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지식, 즉,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고 깊은 통찰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다.

밖과 내를 통합하는 힘은 내에서 나오는 것은 육체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에 더하여, 물질적 형상의 구현은 최종적인 단계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남성성은 생명을 부여하고 여성은 생명을 담는 그릇에 대응하는 형상을 창조한다.

따라서 남성성에 대한 숭배는 제대로 일한 여성성의 지혜다.

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여성은 남성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할 때, 지지와 관심의 정도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수동적 여성성은 남성성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은 부족하더라도 보다 넓은 시점을 바라보는 혜택을 가지고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서로 상보적인 존재이며, 영혼의 진화가 바람직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집단 무의식을 넘어 성별의 구분이 사라지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무의식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투사하고, 남성의 무의식은 이상적인 남성상을 그린다.

무의식적인 메시지는 현재 영혼의 진화에 필요한 것을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남성성은 주려고 하는 성질이며,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전할 정도의 여성성을 가진 대상을 찾게 되어 있다.

남성은 무의식적으로 여성이 가져야 할 합리적인 미덕과 가치관을 가진 여성을 원한다.

왜냐하면 이런 여성과의 교제가 영혼의 완전하고 전체적인 성질을 요구하는 목적에 합치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진화와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남녀 간의 교제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삶의 관점과 가치관이 동등할 때 가능하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이고 전부인 하나님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것에 있다는 것에 의해, 남녀 전원이 합의를 이룰 때, 남녀의 만남은 올바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서로 맞물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쪽의 피해는 똑같이 다른 쪽의 피해로 이어진다.

남성성이 현실에서 자신의 가치를 줄이는 바람직한 여성성을 찾을 수 없을 때, 필연적으로 남성의 정신은 공중에 무너진 상태처럼 된다.

정신은 허공에 날지 않기 위하여 안정되어 있는 설치를 필요로 한다.

남성성은 즐거움과 즐거움을 위한 창조에 몰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여성성과의 만남이 즐거움을 가져오지 않을 때, 남성성의 창조적 능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성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가진 남성성에 의존해야 한다.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여성성이 낮고 나쁜 것은 아니다.

여성성의 수동성은 양보다 질, 넓이보다 깊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남성성보다 깊은 생활의 향유가 가능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약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모두에게 유해함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전체 우주는 하나로 연결된 생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여성성의 지혜를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는 무지에서 나온다.

육체적 형상이라는 한정된 틀에 스스로를 갇힌 여성은 물질의 세계에서 자신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 창조적인 힘을 행사하는 남성을 부러워한다.

대상적 비교는 불행의 종이지만 무지가 여성의 생활을 피해의식으로 가득 채운다.

이는 남성성이 위에서 내려오는 신의 지혜로서 인생을 설계하지 않고, 육체적 형상을 생명의 근원과 착각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남성성이 올바른 질서를 구현하고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남성성과 여성성의 갈등은 끝없이 계속할 것이다.

게다가 남성성이 물질의 세계에 갇혀 소중한 시간을 갈등과 대립으로 소비할 때 여성성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권리를 거부한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쌓는 남성성의 역할이 바라보는 방향과 시점이 잘못되어 생명의 해악을 낳는 악순환은 반복된다.

신과의 합일로 느껴지는 지갑의 기쁨이 남녀간의 육체적 결합에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은, 전체와 부분으로 나뉘어진 현상이 하나님이 스스로가 신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최초의 사건 그러니까. 이분법적 사고가 낳은 모든 갈등과 갈등은 실질적으로 포괄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두 대상이 같은 근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눈이다.

영혼과 물리적 형상 사이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면 모든 이원적 갈등이 끝납니다.

여성성의 지혜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향해 구부러지지 않는 남성의 의지는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정확히 당신 안에 하나님이 있다.

모든 이질적인 대상을 통합하는 일점을 발견했는가?”